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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연결돼 있다는 믿음으로

〈쓰다〉 60호 포스터

지난 리뷰에서 나는 2022년 12월호 비평 특집을 기대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돌봄노동과 그것이 초래하는 인간의 고통에 관한 진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여덟 편의 원고를 읽으며 나는 주제를 바라보는 내 상상력이 몹시 작은 주머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돌봄, 노동, 환경’이란 주제를 통해 밀실에 갇혀 있는 두 사람—돌봄노동의 제공자와 돌봄을 받는 사람—만을 생각했던 나와 달리 비평가들의 원고 속에는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이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한 편을 소개한다.
최선교 평론가는 인간의 소비에 관한 인상적인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인간의 과도한 소비가 타인과 환경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비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정말 인간이 악해서일까?”라는 질문이다.

이 사회가 ‘덜’ 아름다워지는 과정에는 인간이 특별히 나빠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없다. 개인과 집단의 도덕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호소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덕적 수사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이나 환경 부문의 문제 자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과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의 책임이 있는 기업에 ‘악하다’든지 ‘비인간적’이라는 도덕적 수사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도덕적 수사가 사건을 기술하는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될 경우, 오히려 기업의 구조적 문제가 가려지기 쉽다. 기업의 ‘악한’ 행태를 둘러싼 도덕적 수사들은 산업재해를 종종 온정주의적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온정주의적 맥락에서는 환경을 보호하거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제가 기업이 특별히 관용을 베푸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최선교,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중

나쁜 결과가 꼭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범인을 찾는다. 지나치게 익숙해 문제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선과 악을 따지는 일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진짜’ 문제, 즉 ‘구조적 문제’를 가릴 수 있다고 최선교는 지적한다. 환경오염에 관한 것이든 산업재해에 관한 것이든 우리가 돌봐야 할 세계의 문제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한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세계가 더 나쁜 방향으로 발전해 왔듯 누군가는 사람들의 눈을 가릴 것이다. 지금껏 자본주의가 그렇게 흘러왔듯이, 가령 생산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이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취급될 것이고, 기업은 ‘친환경’ 제품을 쏟아내며 소비를 부추길 것이다.

만약 인간의 몸과 사회 시스템을 연결하는 물질적 상호 교환의 감각이 없다면, 노동자 계급의 허파는 그저 허파일 뿐이다. 그러나 상호 연결성의 감각은 눈에 보이는 것(허파)에서 보이지 않는 것(사회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누군가가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어떤 노동 환경에서, 어떤 식사를 하고, 어떤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등의 정보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허파 이미지는 개인이 경험하는 사회·경제·정치적 맥락에 관한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이 증거가 채택되는 방식은 서론에서 언급한 도덕적 수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타인의 신체가 사회 시스템과 연결됐다는 사실이 가시화될 경우, 그것이 나의 신체와 무관한 맥락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드러난다.
최선교,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중

최선교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개인의 윤리적 행위가 ‘당연한 것’이 되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판타지 같은 이 문장이 우리 삶에 적용 가능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스테이시 엘러이모Stacy Alaimo의 ‘노동자 계급의 허파’ 이미지를 제시한다. 노동자의 고통받는 신체는 개인이 감수할 각자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시스템이 초래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이처럼 시스템이 개인의 고통과 비극을 낳았다면 이는 같은 구조 아래 연결돼 살아가는 모든 삶과도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결국 상호 연결돼 있다는 이 감각이 ‘윤리적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한 사람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개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시스템을 우리가 두고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김잔디_[비유]편집자 | 사진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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