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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내 것이 아닌 이야기

웹진 [비유] 44호의 <쓰다> 포스터

“어릴 적에 나는 늘 혼자였어. 엄마 아빠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자정이 돼야 식당 셔터를 닫았고, 고학년이던 언니는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했으니까. 엄마가 미리 만들어둔 장조림이나 멸치볶음을 꺼내 밥을 먹고 상을 밀어 두면 할 일이 없었어. 언젠가부터 욕조에 물을 가득 받고 그 안에서만 놀았어. 물속에서 숨 참기 신기록을 세우거나 비닐봉지를 찰박이면서 생선 장수 흉내를 냈어. ‘한 마리에 천 원이요 천 원’ 하면서 욕조에서 가족이 오기만 기다렸어.”
다섯 살 터울의 동생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TV 채널이 몇 개 없던 시절이라 어린이를 위한 볼거리는 금세 끝이 났을 테고, 얼마 없는 장난감이나 인형도 며칠 사귀다 보니 좀 지겨웠을 거다. 참을 수 없이 심심했을 거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을 거다. 현관문을 잠그고 창문을 잠그고 화장실 문까지 잠가야 비로소 안심이 될 만큼 그애에게 혼자 있는 집은 몹시 불안하고 무서웠을 거다. 20여 년이 지난 일을 동생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들려줬다.

아연이는 혼자 있을 때 현관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도어록이 차라락, 하고 돌아가면 손을 한껏 뻗어 맨 위의 가로 쇠를 지른다. 둥그런 손잡이도 돌려서 잠근다. 그렇게 문을 세 번 잠그면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가끔 누군가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면 아무도 없는 척하려고 이불을 덮어쓰고 숨소리를 죽였다.
주애령, <하얀 밤의 고양이> 부분

여기부터 아연이의 이야기. 학교 수업을 마친 아연이는 편의점에서 ‘1+1’ 상품을 훑으며 배 채울 거리를 찾는다.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때운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텔레비전과 유튜브 추천 영상을 본다. 지루해지면 케이팝 스트리밍을 켠다. 그렇게 늦은 저녁까지 견디면 엄마가 물류센터 일을 마치고 곰팡이 냄새와 함께 돌아왔다.
집이라는 공간은 으레 안온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아연이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얼마 전 이사를 해서 환경이 낯설기도 하겠지만 생활 자체가 퍽 달라졌다. 아빠는 새집에 오지 않았고 엄마 혼자 짐을 정리했다. 하나뿐인 방은 엄마의 인터넷 쇼핑몰 스튜디오 겸 물건 창고가 됐다. 거실은 텔레비전과 에어매트로 꽉 차고 노트북과 책상이 구석에 놓였다. 아연이 방도 침대도 없어지고 좋아하는 그림책들도 사라졌다.

학교 아이들은 가을 학기에 전학한 아연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아연이도 아이들이 무서웠다. 혹시나 아이들이 ‘월세 거지’라고 할까 봐 가슴이 얼어붙었다. 물론 이제까지 그런 말을 한 아이는 없다. ‘그래도 그러는 애들이 많다고 뉴스에서 그러던데.’
아연이는 편의점에서 만난 부동산 아저씨가 “저 집은 월세야”라고 떠들고 다닐 것 같았다.
아빠와 따로 사는 것도 들킬까 봐 무섭다. 아빠가 없는 아이라고 소문나면 누군가 찾아와 붙들어갈 것 같다. 나쁜 데로 잡혀가면 어떡하지. 엄마는 돈도 벌어야 하고 힘도 약하다.

아연이는 나중에 직접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서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엄마도 담임선생도 이제는 글자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3학년인데 아직 그림책을 봐?” 하고 학교 도서관 사서가 물었을 때 아연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림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곳은 아연이가 사는 신우아파트의 작은 도서관이다. 월셋집에 이사 온 게 처음으로 잘됐다고 여겨질 만큼 소중한 공간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변하는 사이 아연이는 우연히 작은 도서관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게 되고 엄마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나 주말에 몰래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렇게 “작은 도서관이 다 내 방 같”다고 느껴질 즈음, 아연이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이 나타난다.

고양이는 천천히 일어나서 등을 우아하게 펴고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오늘밤 잘 보고 있어.
새카만 밤의 아기와
새벽달 같은 아기가 나올 거야.
그 아기들은 모두 너의 친구가 될 거야.”
고양이의 말이 끝나자 아연이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고양이의 얼굴에 닿았다. 하얀 고양이의 얼굴은 북극여우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싸늘함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과 어깨를 감고 온몸을 가득 채웠다. 마치 빙하를 들이마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서리로 변하는 그때, 창 밖에서 두툼한 눈송이 수만 개가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고양이가 아연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감촉은 일순간 달라진다. 아연이의 혼자 있는 시간, 외롭고도 아슬아슬한 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 시간을 하얀 고양이는 지켜보고 있었노라 말한다. “난 네가 누군지 알아. 매일 밤 여기서 그림책을 펴고 소리를 내어 글자들을 읽었지.” 눈처럼 부드럽고 차가운 아기 고양이들, 곧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말하는 아연이의 속삭임, 도서관 바깥의 겨울 이미지가 뒤섞이면서 작품의 후반부는 부드러운 젤리처럼, 흐르는 물처럼, 한 편의 시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는 아연이에게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빠져나와 끝으로 나의 이야기. 어린 동생의 욕조 이야기도 아연이의 하얀 고양이 이야기도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다. 철저히 혼자였던 유년의 어둠을 비추기 때문이다. 조명된 그 자리를 짚을 때 비로소 나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 그런 믿음이 내 것 아닌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게 한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하얀 고양이가 말해 줄 거다. 나는 네가 누군지 알아.

남지은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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