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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12무용가가 사는 집,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로 가다

무용가 박명숙의 <혼자 눈뜨는 아침> 공연 모습.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1960년대의 시골 사람을 벗어나지 못했다. 농경시대의 끝자락에 딱 붙어서 움직이거나 떨어지면 죽을 것만 같아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신념과 생활감정으로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게 참 힘들다. 몸은 노동자였으되 마음은 농부였던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늘 말했다. “돈은 치사한 것이다.”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말이 내게 돈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심어줬다. 그 가르침 덕분에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늘 아등바등댔다.
왜 이런 구질구질한 변명으로 글을 시작하게 됐을까. 이것 또한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다. 강남은 무턱대고 부자가 사는 곳이란 편견 때문이다. 강남구 중에서도 역삼동. 그곳이 어떤 곳인지, 찾아보면 다 나온다. 이달의 공간은 강남의 역삼동이다.
1982년 무렵,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살고 있던 현대무용가 박명숙을 만나러 갔다. 역삼동 네거리엔 높고 높은 빌딩들이 올라가거나 올라가는 중이었고 그 개발의 위용에 이미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건너편의 넓고 넓은 개나리 아파트 단지에서 동(棟)과 동 사이를 얼마나 헤맸던지. 숫자가 적힌 안내판자가 여기저기 친절하게 박혀 있으련만 내겐 나무숲을 헤매는 것보다 더 어지러웠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이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박명숙은 네 살이 되던 해, 어머니로부터 장고를 배웠고 소녀 시절엔 발레를, 대학에선 현대무용을 전공한 무용가였다. 그를 처음 보자마자 자태와 매무새에 반했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였지만 왠지 ‘무용가 박명숙’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결혼과 예술 사이에 안전한 비무장지대를 마련해준 분들이 계셨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가 일하는 직장인 회기동의 경희대학교 무용학부 교수실에도 자주 갔다. 무용이란 예술의 향기가 가득하던 작은 방. 그리고 그의 여러 가지 태도를 통해 소설가와 무용가의 차이를 알게 됐다. 작업을 오로지 혼자서 하는 소설가는 근원적으로 외톨이이며 이기적이고 소심하고 총체적으론 쪼다이기 쉽다. 그런데 무용가는 달랐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무용단과 함께 완성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독무를 추기도 하지만 거기엔 미술이나 음악, 영상과 의상 등은 물론 연출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품이 컸다. 박명숙은 ‘개인’과 ‘집단’의 특성을 잘 조화시켰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던 화가 최욱경의 집에도 놀러 다녔다. 최욱경은 베토벤의 6번 교향곡을 틀어놓고 박명숙에게 춤을 추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진의 <님과 함께>로도 춤춰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베토벤과 남진 사이의 춤사위를 구경하는 즐거움은 행운이었다.
이후 박명숙은 장편소설인 <혼자 눈뜨는 아침>을 안무해서 국내외의 수많은 극장에서 공연했다. 그가 소설을 춤으로 바꾸는 과정을 지켜보며 장르의 차이와 독립성을 알게 됐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등단하던 해, 신춘문예 당선작이던 >확인>의 한 문장을 최욱경 화가가 그림으로 그렸었다. 문장과 그림이 만나서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던 충격과 함께 박명숙의 춤도 소중한 추억이 됐다.
박명숙과 이웃으로, 그리고 사람 됨됨이의 안팎을 서로 휘젓기도 하면서 살아온 지 수십 년이 되었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서로의 삶에서 일어나고 지워지고 잊히고 기억의 창고에 쌓였다. 현대무용가인 그가 고관절 수술을 했을 때 그가 감당할 절망감과 슬픔을 지켜보았다. 회복기를 거쳐 마침내 후배의 무대에 섰을 때, 그 무대를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그의 절제할 수밖에 없는 춤사위에서 ‘숙명’이란 덫을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최근에 오래도록 단둘이 함께 살던 그의 아버님이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님이 함께 지내던 공간에 혼자 남겨진 칠순 가까운 딸의 공허가 마음에 짚여서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한다. 그의 후배와 제자들이 차려준 환갑잔치에서 그의 아버님이 말했었다.
“……말도 말아요! 명숙이 때문에 집 몇 채 팔아먹었어요!”
대학교수 무용가가 월급으로 못 살고 집을 팔아서 무용단을 꾸리며 살았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까…… 무용을 떼어놓곤 상상할 수 없는 박명숙. 현실과 무용 사이의 다리는 누가 놓을까.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제공 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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