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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오마라 포르투온도와 박성연디바, 노래하다
어느 극장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서울 시내 한 개봉관에서 영화를 혼자 봤다는 거다. 소문대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대단했다. 쿠바 아바나의 풍광은 기막히게 아름다웠고, 얼굴 주름의 고랑만큼이나 깊은 내공을 품은 평균 나이 75살 음악가들의 연주는 우아하고 황홀했다. 극장 문을 나선 뒤에도 음악이 계속 따라왔다. 집에 오는 길에 음반가게에 들러 OST CD를 샀다. 1번 트랙 <찬찬>(Chan Chan)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2001년의 일이다.

1 쿠바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오마라 포르투온도. (프라이빗커브 제공)

18년이 흘렀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콤파이 세군도와 듀엣으로 볼레로 곡 <베인테 아뇨스>(Veinte Anos)를 불렀던 유일한 여성 멤버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이제 89살이 됐다. 1930년 아바나에서 태어난 그는 댄서로 먼저 활동하다 보컬로 전향했다. 사랑의 비가인 볼레로를 잘 불러 ‘볼레로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는데, 이 뿐만 아니라 쿠바 재즈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를 자신만의 색깔로 소화해내는 만능 보컬리스트다. 이 때문에 쿠바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쿠바의 에디트 피아프(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로도 불린다.
영화에서 함께했던 동료 콤파이 세군도(보컬), 루벤 곤살레스(피아노), 이브라임 페레르(보컬)는 2000년대 초중반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곁엔 이제 엘리아데스 오초아(기타)만 남았다.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요즘 마지막 월드투어 <라스트 키스>를 돌고 있다. 마지막 입맞춤이라….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인터뷰를 얼마 전 전자우편으로 청했다.
그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로 활동할 당시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 사랑 이브라임 페레르, 루벤 곤살레스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생각나요. 작은 공연부터 큰 페스티벌, 그리고 공항에서 무한정 기다리며 주고받은 농담과 웃음까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그리워요. 그래서 공연할 때마다 그들을 추억하고 기리는 시간을 마련한답니다.”

2 한국 재즈계의 대모 박성연. (JNH뮤직 제공)

살아 있는 전설의 디바들

지난 5월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서울재즈페스티벌에 갔다.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무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노란 머리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무대에 오른 그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일모레 아흔인 노인이 1시간 반 동안 서서 노래할 순 없을 터였다. 인터뷰에서 “나는 여전히 10대”라고 장난 섞인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역시 나이를 속일 순 없구나, 생각하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차게 큰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다.
전성기만큼 섬세하진 않았지만, 그의 노래에선 에너지가 느껴졌다.
89살 디바의 노래에 맞춰 20~30대 청년들이 춤을 췄다. 나라, 언어, 나이의 장벽은 달콤한 밤공기 사이로 스르르 녹아 없어졌다.
순간 또 다른 디바가 떠올랐다.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I did it my way~”(지난 세월이 말해주듯 난 온갖 역경을 맞았고, 내 방식대로 해왔어) 그가 토해내듯 쏟아낸 <마이 웨이>(My Way)의 마지막 소절이 들려오는 듯했다. “마이~”를 더 길게 끌고 싶었으나 힘에 부쳐 짧게 끊은 게 못내 아쉬웠는지, ‘오 마이 갓’을 소리 없이 삼키던 그 얼굴이 눈에 선했다. 지난해 11월, 한국 재즈계의 대모 박성연은 40년 전 자신이 문을 연 한국 최초의 토종 재즈클럽 야누스의 탄생 40돌을 축하하는 무대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노래했다.
1978년 11월, 박성연은 “재즈를 실컷 노래하고 싶어” 서울 신촌에 야누스를 직접 차렸다. 재즈가 좋아 미군부대 클럽에서 어깨 너머로 보고 독학한 한국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이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고 밤늦게 이곳에 모여들었다. 여기선 재즈를 마음껏 연주할 수 있었다. 매일 밤이 축제였다. 하지만 재즈는 늘 비주류였다. 야누스 또한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신촌, 대학로, 청담동을 거쳐 지금의 서초동 교대역 부근으로 옮겨야 했다. 빚이 쌓여가자 박성연은 2012년, 평생 모아온 자식과도 같은 LP 1,700장을 단돈 1,000만 원에 팔았다. 그럼에도 지속된 경영난에다 지병마저 악화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2015년 아끼는 후배 보컬리스트 말로에게 야누스를 넘기고 병원에 입원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야누스의 40살 생일을 축하하러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 박성연은 인사말도 생략한 채 노래부터 시작했다. “밥 먹는 것처럼 매일 노래해야 하는 사람”이 병원 6인실에 누워만 있었으니 오죽 배고팠을까. “연습을 못해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하면서도 노래하는 내내 그의 얼굴에선 행복이 넘실댔다. “결혼도 못하고 적자만 냈지만, 후회는 없어요.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야누스를 할 거예요.” 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지난해 발표한 앨범 제목은 <오마라 시엠프레>다. 언제나(siempre) 노래하는 오마라로 살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박성연은 올해 3월 박효신과 듀엣으로 디지털 싱글 <바람이 부네요>를 발표했다.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세상엔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모두/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마주봐요/ 처음 태어나 이 별에서/ 사는 우리 손잡아요”. 박성연도 오마라처럼 오래오래 노래했으면 좋겠다. 박성연의 노래에 20~30대 청년들이 춤을 추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보고 싶다.

글 서정민_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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