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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6“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1970년 세종로의 모습

시인 신경림 선생님과 이웃하고 산다. 선생님은 길음동에서 수십 년을 사시다가 지금은 정릉동에 사신다.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황후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베란다로 들어오는 곳이다. 선생님을 뵈러 가거나 정릉을 산책하러 갈 때면 그냥 걸어가는데 한 이십여 분 걸린다. 걷는 걸 좋아하는 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땐 어디서 어디까지 걸었다는 걸 서로 자랑하기도 한다.
지난해 송년이니 망년이니 해서 거리와 음식점이 분주할 무렵 선생님과 그런 곳에서 점심을 먹고 집 쪽으로 걸었다. 찻길보다는 뒷골목에 인생의 냄새가 더 짙어서 그런 곳만 이리저리 골라서 걸었다. 그러다가 지하철 4호선 길음역 7번 출구에 이르렀다.
이곳. 7번 출구. 내겐 그냥 출구가 아니다. 이곳에 이르면 한사코 눈길이 가닿고 머물게 되는데 더러 사진도 찍어둔다. 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저절로 핸드폰을 꺼내 풍경을 담아둔다. 마치 곧 헤어질 것처럼. 사실 헤어지는 건 이미 정해졌다. 재개발지역이기 때문이다. 무슨 보상 문제가 얽혀서 여태 허물고 짓지 못했을 뿐이니 어느 날 갑자기 포클레인이 한두 시간 만에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버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찍어둔다. 늘 가난하고 찌그러지고 낡은 것에 닿는 내 호기심과 무수한 애잔함의 분출은 천성이 궁상맞아서? 본래 천출이라서? 총체적 흙수저라서? 분명 이유가 있으련만, 아무래도 괜찮다.
그날 선생님께 그 골목으로 걸어가보시겠느냐고 물었다. 한낮에도 무언가 음산하고 좁은 골목에서 망측한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좋지! 하셨다. 입구의 양쪽으로 붙은 상점과 상점들보다 더 크고 화려한 간판들 사이로 골목 입구는 숨어 있었다. 두어 발자국 들어가면 이내 길가의 모습과는 다른 시간과 세월과 인생이 확 다가왔다. 우산 하나를 펼칠 수도 없는 골목. 뚱뚱한 사람과 마주치면 비켜서기도 어려울 것 같은 골목. 더러는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랜 것 같고 더러는 아직도 살고 있어 가죽 세공을 하고 달세를 받는 여관을 하고 점을 보고 또 관상과 사주를 보며 옛날목욕탕도 있는 골목.
“내가 살던 집도 여기 어딘가 그랬는데…….”
선생님이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개운산 채석장에서 나온 석판을 가져다가 반들반들 윤이 나게 가는 일을 했단다. 그래서 온 집 안이 뽀얀 돌가루가 쌓여 있었다. 선생님은 골목의 고만고만한 집 두 어 채 앞에서 당신이 지냈던 그 집인가 어림하셨다.
“그 집이 여긴가? 집에 온통 돌가루가 하얗게 깔려 있었어. 아들 과외를 시켜주면서 아침 먹고 잠만 잤던가?”
1950년대 후반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엔 순식간에 달려와 당신 앞에 마주한 과거를 본 사람의 눅눅하고 민망한 그리움이 배인 것 같았다. 그 골목을 나와 시장으로 들어섰다. 시장은 여러 번 ‘현대화’되었을 것이다. 크지 않지만 좌판을 벌려서 음식을 파는 식당가, 생선과 야채를 파는 가게. 비닐이나 철물 그릇을 팔고 옷을 팔고 헌옷을 고치는 가게들. 여러 개의 고깃간. 그 건물 2층엔 콜라텍도 있다. 선생님과 그런 곳의 골목을 지났다. 이곳 시장에 와서 일만 원 안팎의 셔츠나 바지를 사서 입는 선생님.
시장 건물을 빠져나오면 순대와 어묵, 떡볶이를 팔고 과일과 생닭을 파는 집들이 있는데 거기 어디쯤에 선생님의 단골 선술집이 있었다. 돈이 없어서 간판도 붙이지 못한 집. 돈이 없기로는 시인 신경림도 마찬가지였다. 시내에 나가 술을 얻어 마시고 통금 전에 돌아오다가 무언가 술이 부족하다 싶어 들르는 집.
막걸리 한 잔, 소주 한 병, 혹은 맥주 한 병으로 취기를 꽉 채워야 비로소 하루를 마감하게 되던 가난한 젊음. 주머니는 늘 텅텅 비었고 몸에선 자꾸 술을 보챘고 영혼은 취하지 못해 울곤 하던 시절의 시인. 돈암동이 종점인 버스에서 몸을 내려 통행금지를 뚫고 길음동에 이르러서도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하는 날이면 젖은 눈시울을 훔치듯 들르게 되던 술집. 간판도 없이 두어 개의 탁자를 놓고 술을 팔던 집. 외상술을 마시고 외상값을 갚고 또 외상을 달곤 하던 술집 주인의 딸을 위해 그는 두 편의 시를 지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부분)
어쩌면 시인 신경림의 세월은 적어도 미아리고개와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마을, 길음동과 정릉에 이르는 공간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詩)로 늘 싱싱할 것이다.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김영호_서울문화재단 혁신감사실 혁신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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