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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6월호

예술계 표절 논란과 비평의 과제표절, 자본의 논리와 예술의 윤리 사이

자본시장이 확장되면서 자본이 예술을 잠식하고 예술은 자본에 종속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자본의 논리가 비평의 논리를 무색하게 한다.
잘 팔리는 것이 예술의 공공선이고 예술성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 과정에서 ‘표절’은 예술가의 윤리의식을 지워버리고 있다. 상업 권력의 뒤에서
‘표절’을 ‘모방 미학’이라 자위하며 양심선언 하지 않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예술의 창조성을 위한 예술가의 고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예술계 내부의
성찰이 필요한 지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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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김종길미술평론가
발제 |
오창은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김지연미술평론가
김소연연극평론가
토론 |
김재엽연출가, 드림플레이테제21
홍지석미술평론가, 단국대 연구교수
이성혁문학평론가
일시 |
2016. 5. 13(금) 14:00~18:00
장소 |
서교예술실험센터

[ 발제1 ] 창조성과 표절의 경계 위에 선비평 증언자들
비평 논쟁을 통해 본 신경숙 표절 사건의 역사적 성찰

[ 발제자 ] 오창은 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제가 관심 있는 내용은 비평과 창조성의 관계 속에서 표절을 다루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비평의 위기가 표절과 상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1920년 염상섭과 김동인의 논쟁은 근대 비평 논쟁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사와 변사의 논쟁으로도 유명한데, 자기 의도에 맞게 편집해서 상호 인신공격 하는 비평의 속성이 이 논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응노와 남관의 창작과 모방에 대한 뜨거운 논쟁은 현대미술사에서 쟁점이 되었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봉합되었습니다. 1993년 문학평론가 김영혜와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영화 <그대 안의 블루>를 둘러싼 논쟁은 페미니즘 논쟁이기도 하고, 비평의 전문성에 대한 논쟁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는 시기에 문학비평가가 영화를 비평하는 것에 대해 반박한 것입니다. 신경숙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문학 내부의 논리를 앞세웠던 대응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최원의 ‘표절에 대한 짧은 소회’2라는 글은 표절 논쟁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환기시켜 줍니다. 그는 사적으로 계속 수렴되어버리는 것과 공적 이익으로 사라지는 개념을 얘기하면서, ‘대중과 함께 사유하며 함께 투쟁하며 스스로를 소멸’하는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3가 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작가는 자신의 문학이 대중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역할을 하기 바라면서도, 사적인 이익으로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이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습니다. 예술적으로 진지하게 성찰해보아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 발제2 ] 미술 유통 시스템, 표절의 효용성, 창작 윤리

[ 발제자 ] 김지연 미술평론가

미술은 시각적으로 모방하는 측면이 많아서 표절의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평론가들은 표절에 대한 가부를 판단하지 않고 뒷짐만 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미술계에서 표절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최근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 번째, 자개를 붙이는 작업을 해온 김유선 작가는 자신의 <무지개>라는 작품과 김영준이라는 공예가의 <코스모스>라는 작품이 유사하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김영준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우연히 비슷한 것’이라고 얘기하는 상황입니다. 황인기 작가의 <금강전도>와 김종숙 작가의 <인공의 풍경> 두 작품 모두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차용한 작업으로 김종숙이 소송을 진행해 승소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독창성이 없다는 판결문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대구미술관 신진 작가 공모전에 당선된 박정현 작가의 < disturbing >은 손몽주 작가의 고무밴드를 활용한 설치 작품과 외견상 유사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박정현을 옹호하는 소견서를 이론가나 기획자들이 써주었다는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전시금지 가처분을 받고 철거되었습니다. 배종헌의 <별을 그리는 방법>은 제2회 고암 이응노상 수상전(작업집서)을 열면서 이슈가 되었고, 천영미 작가는 <비밀의 별>로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습니다. ‘별’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 태도를 갖고 있지만, 온전한 별이 아니라는 형태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 예술인력육성사업에 선정된 한정우 작가는 미국 작가(Mike Womack) 작품의 표절을 인정했습니다. 최근 이명호 작가는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마리 카트란주(Mary Katrantzou)가 자신의 2013년 작품 <나무…#3>을 도용해 상품을 만들었다는 소송을 미국 법원에 제기했습니다.
사실 표절 시비를 걸지 않은 많은 사례는 미술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사 작품들이 거래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새로운 작품보다 아류가 훨씬 잘 팔리고, 아류처럼 하는 작가를 밀어주기도 합니다. 표절 논쟁이 등장할 때 윤리나 도덕을 얘기하는 풍토 자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스타일이나 재료, 도상이나 콘셉트를 한 작가가 독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는 논리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도덕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양심에 맡겨야 합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못 알아보더라도 작가는 압니다. 그런 상태에서 매개하는 사람이나 판단해서 권위를 실어주거나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갖고 유사한 작업의 유통망을 바라봐야 할지가 숙제입니다.

[ 발제3 ] 비평은 표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 발제자 ] 김소연 연극평론가

연극계의 표절 논란은 법적 공방으로 가기는커녕 대부분 가십 기사로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SNS를 중심으로 어떤 작품과 비슷하다고 떠들기는 하지만 책임을 지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SNS는 전체 공개를 할 경우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고, 문자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나마 해외 공연에 대한 표절 의혹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매체의 영향이 큽니다. 영상 기록이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공연은 원본 대조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표절여부를 확신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실 더 어려운 것은 공연의 독자성입니다. 예를 들어 두 공연의 무대 디자인이 유사해 보일 때, 연출이 표절한 것인지 디자이너가 표절한 것인지, 대본 자체의 유사성 때문인지 판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물꼬가 터진 건 이미지의 유사성이지만 그것만으로 표절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극계에는 표절 논의가 많이 축적되어 있지 않습니다. 연극계 원로의 회고담 같은 곳에서나 포착되지 기록 자체가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연극평론> 2016년 봄호(Vol.80)의 ‘연극과 표절’ 특집이 아마도 공개적인 논의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표절 논란이 나오면 창작자의 윤리라든지 고발 정신, 용기와 결단으로 자꾸 이야기가 흐르는데요. 용기만으로 지금 얽혀있는 문제들이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연극에서 표절 논란을 일으키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뒤늦게 원본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표절로 확인되는 경우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 세련되고 혁신적인 무대라는 상찬이 쏟아진 작품도 많습니다. 비평이 이 작품의 성취가 지금 여기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조금만 더 잘 읽을 수 있었다면 표절을 의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서구 연극의 이식 혹은 수용으로 시작된 근현대 연극은 여전히 그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단 창작자만이 아니라 비평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서 빨리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저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콤플렉스는 오히려 비평계에 더 만연한 것이 아닌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창조적 수용과 이식의 종이 한 장 차이를 구별하고, 자기 삶에서 자기 연극을 발견해내는 안목을 키우고 탄탄히 해내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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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연극계 안에서 표절에 대한 하나의 가설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 갔던 분들은 당시 유행하던 리얼리즘 계열의 연극을 정극의 개념으로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1960~70년대 유학을 갔던 1세대 선생님들의 경우, 본인들의 세계관은 상당히 보수적인데 예술철학 안에서는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연극을 보고 오신 것 같아요. 결국 서양 연극을 정극이라 보고 본인들의 세계관으로 이해하지 못한 미학적인 질문들을 형식적으로 차용하게 되는 결과를 표절했다고 하는 의식적인 측면이 있고요.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부르주아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으면서 철학적인 세계관으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학을 정극으로 수용하다 보니 트렌드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요. 어르신들을 보면 외국 연극에 대해서는 굉장히 진취적인 기호를 갖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이라서 해외에서 공부하던 당시에 취한 태도와 한국 사회 안에서 실현하는 방식과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철학과 방법론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나의 미장센이라든지 표현 기법만 앙상하게 남다 보니, 결국은 하나의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표절에 가까운 형태가 된 것이지요. 지금 활동하는 선후배들도 철학적 가치나 사회사상으로서의 실험이 아니라 미장센 차원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특정 예술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연극의 미약한 토대 안에서 서양극이 정극이고 트렌드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소연
연극에서는 표절이 누구의 것을 지켜준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 논의의 핵심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서구문화의 모방과 이식 과정에서 표절이라는 관행, 창조성에 대한 자기반성이 무뎌져 있는 양상에 대해 얘기했는데요. 김재엽 연출가가 얘기한 표절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훔친 것이라기보다는 관점이나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 껍질이 들어오고 그 껍질이 계속 흥행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인 것 같습니다.
김종길
미장센에 머무르고 있는 지점, 창작의 방법론이나 실험이 부족한 부분, 외국 연극에 대한 한국 연극의 태도로서의 하위적 인식 같은 것을 말씀하셨는데요. 이런 부분에 표절의 지점이 있다는 지적은 따끔하게 들립니다.
홍지석
예술에서 표절은 엄격하게 규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제시해주신 사례마다 문제의 층위가 조금씩 다른데요. 다양한 사례별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표절 사례를 열심히 모아야 하고 이것이 단편적인 추문으로 남지 않으려면 좀 더 엄격하게 기록으로 남겨야합니다. 표절 논쟁이 발생했을 때 진행되는 과정, 제기되었던 관련 이슈, 비평, 신문기사, 법적 판결문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추이를 관찰해서 모아놓는 접근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단편적인 하나의 법으로 문자화해서 어디까지가 표절이라고 기록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니 오히려 표절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많이 알고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혁
저는 표절 문제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개념이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표절은 사적 소유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저작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이 예술의 장에서 사적 소유의 개념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고,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착취의 바탕이 되는 개념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표절을 용인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문제는 표절을 해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 저작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조경란의 <혀> 논쟁도 있었는데요. 유명한 소설가와 출판사는 무명 소설가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출판, 저작권을 행사해 이득을 보지만 그 아이디어 제공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표절은 사실 유사성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표절의 바탕이 되고 있는 노동, 원본임을 주장하지도 못하는 학생들이 해놓은 것을 갈취해가는 부분까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오창은
‘사라지는 매개자’는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 권력의 화신으로 변절됩니다. ‘사라지는 매개자’였다가 거기에 대한 공허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을 때 그것을 수행해야겠다는 의지가 개입되고 나로 수용되기를 원하는 순간 파시즘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철학적인 문제 제기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김종길
표절이라는 근대 이후 개념의 논쟁성을 여러 층위에서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표절 문제를 강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하면 작가주의 논지를 옹호하는 측면이 발생합니다. 작가주의는 비평의 전문성 문제를 끌고 들어가게 되는데, 얼마나 차이를 드러내야 하고 닮아 있는지를 비평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사라지는 매개자’가 갖고 있는 과거 서사의 전이적인 현상들은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법적 문제나 윤리성 문제로 접근해온 지점은 비평계가 따로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표절이 제기되고 증폭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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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석
미술계에 잠재한 많은 표절 문제 중에서 어떤 문제들이 이슈화되는지, 작가들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점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표면에서 만나게 되는 표절 문제들은 어떤 특수성을 갖고 있을까요.
김지연
처음에는 재산권 침해와 관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미술 시장에서 나의 위치가 위험해질 염려가 있을 때 표절을 문제 삼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요. 막상 시장에서는 활발하게 유통되지만 표절이 의심되는 작가를 거느리는 예술가는 표절 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시장의 층위가 굉장히 다양해서인데요. 예술가를 ‘급’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독창성과 좋은 예술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작가와 그 작가를 사전에 알아보는 컬렉터의 세계가 있다면, 이와는 무관하게 유사하지만 다른 것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존재와 시장이 있습니다. 이 두 시장은 섞이지 않아요. 버젓이 ‘표절스러운’ 작품을 작가가 만들고 그 작품을 누군가는 삽니다.
단순화해 생각하면 작가는 어떤 권위가 표절자를 인정해줄 때 그것을 제일 힘들어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질적으로 누가 잘 팔린다가 아니라, 어디에서 상을 받는다든지 작가에 대한 주목도가 올라갔을 때입니다. 인정 투쟁의 장인 예술계에서 본인이 산고를 겪으며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한 것을 인정해주는 행위를 만났을 때 용인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독창성과 새로움이라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가 미술판에서 위협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오창은
1999년과 2000년에도 비평가들이 신경숙의 표절을 제기했는데요. 당시 문학계에서는 유명한 사건이었지만 시민사회로 확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작년에 사건이 증폭된 중요한 원인은 아래로부터 끌어올라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미디어의 대응이 중요했다면, SNS로 맥락이 달라진 것이 주요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문학에서의 표절 문제는 당사자성이 강했습니다. 당사자의 문제 제기에 대응해서 대상이 상징 권력을 갖고 있을수록 문제의 파급효과가 컸습니다. 신경숙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시민사회의 배신감이었습니다. 막대한 자본권력과 부합되는 연장선상에서 출판사인 ‘문학동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나도 피해자라는 의식이 증폭되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시민사회가 연루되어 있어서 증폭된 것이지 문학이 특별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봅니다.

윤리 문제로 국한되는 것 경계해야

홍지석
표절을 정의롭게 비판하고 단죄하면서 얘기할 때 갖게 되는 우려는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를 옹호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표절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작품에 대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 스타일의 독점, 창의성, 독창성이라는 다소 낡아 보이는 개념들을 옹호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죠. 자본의 사적 소유를 옹호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절을 비판할 수는 없을까요.
오창은
우리는 표절을 개인의 윤리 문제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의 윤리 문제를 심오하게 따져보자는 순간, 전문가주의라든지 작가를 옹호한다든지, 문제의 본질을 훼손하는 논의가 되곤 했습니다. 신경숙 표절 사건은 1년 정도 지나고 나니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요. 한 비양심적인 작가의 일탈 행위인지, 근대 예술의 형성 과정에서 필연성이 존재하는지 하는 부분입니다. 서구적인 것을 닮아가거나 양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낙후된 것으로 얘기되고, 세계화 담론이 거창해질수록 오히려 표절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는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떻게 가능할지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술적 양식에서 공통의 것은 어느 범위까지인지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모든 표절을 한 개인의 의도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로 얘기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소연
저도 표절 문제를 윤리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남의 것을 훔친 것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 권리나 권력을 강화해주는 양상으로 전개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도리어 ‘다 표절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역발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표절을 다루는 다양한 층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저작권 문제로 해결해서도 안 되고, 작가의 윤리로 몰아가서도 안 됩니다. 현상을 분리해서 대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작권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조경란의 <혀>와 드라마 <피리 부는 사나이>는 같은 사례입니다. 공모전의 심사위원, 권위 있는 전문가가 아이디어를 빼갔다는 표절 논쟁이잖아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행사하는 부분에 대한 저작권적인 개념을 법적으로 명료하게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표절 문제가 저작권과 법적 권리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그래야 우리가 표절 논의를 통해 도리어 지양하고자 했던 가치를 옹호하는 꼴이 되는 것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표절 사건, 그 이후를 생각하다

오창은
신경숙 표절 사건은 기존의 한국문학계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습니다. 출판계가 힘든 상황에서 작품이 있음에도 출판을 하지 않는 타격이 있었습니다. 작가들 입장에서는 자존감 훼손이 컸고요. 매체 측면에서는 편집위원이 전면적으로 개편되고 구세대의 퇴장이 있었고, 조직 측면에서는 자기 성찰을 하는 소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젊은 작가들의 ‘기존의 창비나 문학동네가 아닌 다른 방식은 없을까’ 하는 시도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작가들의 자존감 회복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신경숙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문학에 대한 환멸로 시민사회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김재엽
사실 연극에서 상품으로서의 표절은 논외가 되어 있습니다. 재공연의 저작권이라든지, 초연은 연출가가 했는데 프로듀서가 재공연하면서 자기 연출로 하는 경우가 워낙 많습니다. 공공 극장에서 표절했던 연출가가 그 작품을 통해 유명해지면서 하나의 권력을 형성하고 있고요. 그분이 심사에 들어가고 작품을 통해 권력을 가지면서, 권력에 대해 얘기하지 못하는 검열을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습니다. 표절 문제는 상업 권력이든 공공 권력이든 검열과도 겹치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표절과 검열이 같은 의미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검열에 대해 싸우지 않는 예술가들은 표절의 추문에 같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종길
표절은 철학적 논지 안에서만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신경숙 본인이 권력이면서 출판사 뒤에 숨은 태도 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자본이 깊게 개입해 있어서 본인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수상 제도라든지 표절 작가가 사회적으 로 잘 팔릴 때 원작자가 소송하는 방식이 얽혀 있는 것입니 다. 예술의 표절 문제가 좀 더 깊게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 제기의 여지를 남기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문화+서울

* 본 토론회는 자율실천공공회의(준)와 리얼리스트100의 공동주최로 열렸으며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 ‘현장+담론’프로젝트에서 후원했습니다.
* 토론 내용은 서울문화재단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니며 [문화+서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1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
  • 2 최원. 표절에 대한 짧은 소회. <문화과학> 2015년 겨울호(통권84호), 2015.12, 306-313
  • 3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i?ek. 1949~)가 자주 쓰는 개념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개념을 가리킨다.
    (출처: <한겨레> ‘유레카 | 사라지는 매개자’, 고명섭 기자. 2012. 2. 5)
정리 전민정
객원 편집위원
사진 최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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