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운 접근성과 비장애중심주의 사이 접근성, 공연의 창·제작 과정 다시 쓰기
2020년 서울문화재단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에서 초연한 <무용수-되기>. 기획 커넥티드에이, 제작 김원영 × 프로젝트 이인
2011년에 학교를 기반으로 프로젝트 극단을 결성했고, 공연 접근성에 관해 고민했다. 관객만큼이나 창작 과정에 배우로 참여한 장애인 구성원의 공연에 대한 접근성 확보가 중요한 화두였다. 우선 휠체어 등이 접근하기 쉬운 연습실 환경과 연습 과정의 의사소통 보장을 떠올릴 수 있겠다. 각기 다른 몸을 가진 배우를 비롯해 프로덕션 전체 구성원의 신체 조건을 고려한 연습 진행 방식을 고민하는 일도 포함된다.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는 제작 문화도 중요하다. 2011년 우리는 대체로 충분히 알고 지낸 학생들로 이뤄진 팀이어서 어려움이 크지는 않았다. 학교 내 편의시설이 갖춰진 공간에서 연습했고, 서로의 차이에 얼마간 익숙했다.
그럼에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은 장벽이 남아 있었다. <햄릿>의 전투 장면을 만들 때였다. 시각장애인 배우와 전동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배우가 각각 비장애인 배우와 칼을 휘두르며 대결하는 장면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출의 고민과 배우의 좋은 연기가 만났고, 상징성을 살려 이 장면을 긴장감 있게 표현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제작자로서) 필자는 망령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까 중증의 신체 장애를 가진 고전 비극의 주인공이 정말로 칼을 휘두르며 상대와 맞붙는 생생함을, 바로 그 신체로서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집착이었다. 상징적 장치 말고, 정말로 우리의 이 몸으로 직접 해낼 수는 없을까? 왜 장애를 가진 배우·무용수가 비장애인(그중에서도 일부) 배우·무용수가 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인상 깊은 장면을 보여야만 하는가? 필자의 집착에는 분명 이른바 ‘비장애인중심주의ableism’라고 하는 어떤 태도가 그 바탕에 있을 것이다. 창작에서 접근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장애가 있는 창작자를, 장애가 없는 몸인 것처럼 재현하기 위한 기술과 규칙의 설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창작에서의 접근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테면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에 대한 접근성은 구체적인 실체가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을 어떻게 재설계해야 하는지를 상상하며 공연장 접근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발레나 피겨스케이팅, 고전적 버전의 <햄릿>같이 비교적 명료한 범례를 가진 분야에 대한 접근성도, ‘공연장 접근성’처럼 우리의 상상에 얼마간 실체를 부여한다. 반면 ‘창작에의 접근성’이라는 말에는 접근성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다. 우리는 연습실과 무대의 장애인 편의시설을, 수어 통역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내용을, 그저 장애를 가진 창작자가 프로덕션 전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고 온전히 참여하는 문화적·제도적 실천 정도라고 막연하게 정의할 수 있을 뿐이다.
2022년에 ‘창작에서의 접근성’이라는 말로 추구하고자 하는 일은 시각장애인 배우가 출연하는 <햄릿>이나 다리가 없는 무용수가 춤추는 <지젤>을 만드는 법 따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창작 과정 전반에서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는 문화 만들기’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 목표일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애초부터 뇌병변장애인 배우의 몸이, 다리가 없는 무용수의 몸이 바로 그 몸이기 때문에 가능한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음향감독이, 청각장애를 가진 조명감독이 바로 그 감각적 특성 때문에 발휘하는 역량이 제작 현장에 온전히 통합되는 어떤 순간의 도래다. 창작에서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일이란 남녀노소, 장애 유무, 장애 유형을 막론하고 모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 디자인 화장실을 만드는 일과는 관련이 적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고유한 힘을 지니는 창작자, 창작의 과정, 창작의 결과물은 완전히 민주적이고 무해한 실체일 수 없다. 시각적 자극을 배제하지 않는 음악이란 덜 선명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움직임을 다듬지 않은 춤이란 그저 동작에 그칠 것이다. 다른 충동과 정서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은 희곡은 잡다한 정념의 덩어리에 그칠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신체적·정신적 특질이 접근 가능한 창작물이란 실제로는 민주주의적 참여의 장이 될 수 있을지언정 창작물로서는 아무런 실체도 없을 것이다.
결국 창작에서 접근성을 보장한다는 말은, ‘비장애인중심주의’적 태도로 빙상 경기장에서 공중 4회전을 하지 못해서 한이 맺힌, ‘걷지 못하는’ 창작자의 집착과는 관련이 없지만, 그렇다고 무해하고 민주적인 매끄러운 이념의 철저한 구현도 아닌 셈이다. 장애를 가진 다양한 사람이 참여하는 무대를 제작하는 과정이란, 무엇을 접근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접근 불가능하게 할지를 놓고 계속 협상하는 장이다. 때로 원하는 장면을 위해 고집을 부리고(“네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건 잘 알지만 여기서 더 높게 칼을 휘두르며 들이받아 보라고”), 과감히 어떤 장면을 포기하고(“꼭 발끝으로 서서 회전할 필요는 없지…”), 누군가를 잠시 배제하면서 더 오랜 기간 철저히 배제된 사람을 포함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다(“여기서는 완전히 암전된 가운데 오로지 말로써 무용수의 움직임을 묘사할 겁니다”). 창작 과정에서의 접근성이란 다종다양하게 ‘유해한’ 차별성을 전제로 공연을 풍요롭게 만드는, 미적이고 정치적인 결단의 과정이라고, 2022년의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글 김원영_공연하고 법을 다루고 장애에 관한 글을 쓴다.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법> <인정투쟁; 예술가편> <무용수-되기> 등의 연극, 무용 공연에 출연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 등의 책을 썼다.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