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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11987년 7월 11일 명동성당 뒷마당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 행렬

비행기가 지붕 위로 날아가는 곳에서 몇 년을 살았다. 서너 살이 되어 걷기가 편해진 아이가 추우나 더우나 마당으로 나가 놀았다. 그런데 이 아이가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다. 사이렌 소리와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였다. 비행기보다 더 무서워하는 게 사이렌 같았다. 어린애가 어떻게 사이렌을 무서워하지? 나는 갑작스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공포감을 느끼는 편이고, 지옥보다 공권력을 더 무서워했다. 그런데 왜 어린아이가 사이렌 소리를 무서워하지? 원천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소리인가?
1987년의 그날을 이야기하려고 서론이 길어졌다.
1980년은 ‘서울의 봄’이란 감상적인 단어로 시작됐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움이 남는다. 꽃이 피어도 춥기만 했던 5월, 광주에선 전두환 군부의 동족 살육이란 만행이 시작됐고 그 진위 공방은 아직 완결되지 못했다. 그해 늦봄과 여름 사이에 온 나라를 짓누르던 침묵의 공포 속에서 광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내 정신을 주눅 들게 했다.
이런 1980년, 광주를 지나 전두환 군부는 이듬해부터 대학을 잠재우기 위한, 이른바 ‘녹화사업’을 시작했다. 의식 있는 학생들을 ‘좌경오염 방지’라는 명목으로 강제 징집했고, 일부는 대학에 침투해 정보를 빼내오도록 하는 관제 프락치로 만들었다. 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학생들은 자살하거나 자살당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을 끝내 잠재울 수는 없었다. 백골단과 전경이 상시 주둔해 있던 대학에서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1984년이었다. 1986년 5월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가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분신해 결국 숨을 거뒀다. 7월 권인숙 학생의 성고문 폭로로 온 나라가 들끓기 시작했다.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고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으려 미국문화원 도서관을 점거했고, 미국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으며, 민정당사를 점거했다. 1987년 1월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이 터졌고,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았고(7월 5일 사망), 6월 10일 마침내 전국적인 반독재 군부정권 타도의 불길이 타올랐다. 마침내 온 나라에서, 모든 부문의 종사자들이 더는 침묵하지 않았다. 자기모멸이 본능인 듯 여겨지던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과 사무원들, 그리고 시민들이 다 함께 광장과 거리로 나와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6월 29일 드디어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 복권 등 8개 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있었다. 막힌 것이 뚫리는 시간, 생명을 짓누르는 폭압이 밀려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7월 11일 명동성당 뒷마당에서 축제 마당이 펼쳐졌다. 나는 민주인사도 수배자도 아니었지만 해방감으로 기뻤다. 여성의전화 대표로 일하던 노영희 시인, 동아일보 지영선 기자와 함께 축제를 관람하러 그곳에 갔다. 공연이 잘 보이는 입구 맞은편 위쪽에 앉아서 관람했다. 행복감마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정호용 등을 조롱하는 길지 않은 마당극도 흥겨움을 부추겼다. 우리는 다 함께 박수 치고 웃고 소리 지르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자유를 만끽했다. 막히고 옥죄고 억눌린 느낌이 사라진 육신의 기쁨! 자유로움은 그것 자체로 사랑이고 공유이며 존중이란 걸 알게 해줬다. 흔치 않은 시간, 아직도 생생하다.
관람 관중이 모두 흥겨움에 젖어 있을 때 입구 쪽으로 아는 얼굴 하나가 기이한 형상으로 나타났다. 우람한 몸의 채광석 시인. 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였고 나는 순식간에 불길한 상상을 했다. ‘풀빛출판사’에 변고가 생겼구나! 《한국민중사》를 출판하고 감옥에 있는 나병식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축제가 끝났다. 우리는 명동에서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채광석과 동행하기로 하고 그의 등 뒤로 다가가서 쿡 찔렀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니? 거의 이런 표정이었다. 혼이 그를 떠난 것 같은, 허깨비의 느낌에 섬뜩했다. 섬뜩한 느낌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고요 속에서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자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자야. 광석이가 죽었다….” 소설가 윤정모가 울면서 말했다. 7월 12일 새벽, 그가 관계하던 민요연구회 회원들과 술을 마시다가 헤어져 길을 건너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죽어서 더 커지는 사람들 속으로, 채광석이 들어간 것이다.

흙을 뒤엎으면 이상 한파의 심장 속에서/스스로 새싹을 키워 온 꽃순들을 만나느니/우리들은 버리운 계절의 고통을 귀에 담으며/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이여 너마저 잠재우는/시대의 곤고함과 자아의 무반성을/통째로 흔들어 깨우며/우리는 다시 죽어야 한다 봄에 눈을 뜨는/새싹들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 속에서/사랑과 함께 죽어야 한다.
사랑 안에 사랑으로 죽어 사랑으로 다시/태어나 그 찬란함을 이 봄에 맞기 위해서라면
(후략)
채광석의 시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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