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3호선 전철은 약수역에서 멈춰버렸다. 객실에서 튕겨 나와 취객들과 뒤섞여 거리로 나왔다. 비틀거리며 지나는 택시에 손을 흔들어본다. 동호대교를 건너온 택시들은 탄력을 받아 전속력으로 질주해 금호터널에서 사라져버린다. 금호터널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다. 시원한 바람에 살짝 취기가 깨고, 왠지 익숙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가만, 약수동은 내 고향이지. 저기가 해병대산일 거야. 그 높고 무서웠던 산이 저리 낮았던가. 나는 두리번거리며 우리 집의 자리를 가늠해본다. 맞아. 저 도로 한복판쯤에 우리 집이 있었을 거야. 불쑥 옛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부슬부슬 내리는 밤비를 맞으며 망연자실 서 있다. 저 아스팔트 위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 밤의 빗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를 기다리면 안 될까.
기억 속에 각인된 어머니의 뒷모습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은 약수동에서 막걸리 장사를 했다. 부모님은 전라도 촌구석에서 서울로 상경해 약수동 산동네에 정착했다. 부모님은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하셔서 두어 번 집을 옮겼고, 마침내 산동네를 내려와 약수시장 근처에서 막걸리 집을 열었다.
나는 2남 2녀 중 막내로 유일하게 막걸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나는 엄청난 장난꾸러기였다. 틈만 나면 약수시장과 해병대산을 쏘다녔다. 나의 유일한 낙은 하루 군것질 비용 10원을 받아 떡볶이를 사 먹는 것이었다. 우리 집의 경제권은 어머니에게 있는 듯했다.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두 손을 모으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를 가리켰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드시고 취하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먹만 한 것이 이렇게 컸네” 하며 허허 웃으셨다.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우리 집은 얼음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쓱싹쓱싹 얼음을 잘라 팔았고, 그렇게 일을 많이 한 덕분에 나는 주먹만 하게 나왔다고 한다.
하루는 일찌감치 어머니에게 10원을 받아 재원이네 떡볶이집으로 뛰어갔다. 떡볶이는 10원에 2개였지만, 나는 항상 3개를 먹었다. 1개는 아저씨가 볼 때 여유 있게 먹고, 2개째는 아저씨가 안 볼 때 2개를 한꺼번에 찍어 먹는 방법이었다. 3개를 먹고 흡족해진 나는 약수시장으로 내려가다가 원봉이를 만났다. 그 녀석은 부라보콘을 먹고 있었고, 옆에 있던 중국집 아들 재필이는 입술 가득 짜장이 묻은 얼굴로 부라보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봉이가 놀자고 했지만,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머니에게 떼를 썼다. 우리 집도 막걸리 장사 말고, 떡볶이 가게나 중국집을 하자고 했다. 어머니는 묵묵히 안주용 도루묵을 구웠다. 나는 다시 도루묵을 달라고 떼를 썼다. 결국 어머니에게 등짝 맞고 가게에서 쫓겨나 방 안에서 한참 울었다.
어른이 된 나는 어머니 말씀을 잘 거역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어릴 적에 봤던 그 장면 때문인 것 같다. 그날 저녁 때쯤, 가게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 보니, 어머니가 어떤 늙수그레한 아저씨와 싸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저씨에게 삿대질을 했고, 아저씨는 어머니를 밀쳐냈다. 이어 경찰차가 들이닥쳤고, 어머니를 끌고 가려고 했다. “놔놔. 내가 걸어갈 거야.” 어머니는 경찰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실랑이 끝에 경찰에게 끌려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만 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값 문제로 손님과 실랑이가 붙었다고 한다. 술값이 50원인데, 그 손님이 30원만 내서 어머니와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그 손님은 엄마에게 맞아 어금니가 빠졌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를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밤늦게 돌아오셨다. 하지만 악다구니 치며 끌려가던 어머니의 뒷모습과 방 안에서 어머니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간은 아직까지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와 마시는 막걸리
약수역에서 헤맸던 그 주말에 경기도 지평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어머니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평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로 계신다. 어머니를 찾아가면 늘 면 소재지에서 지평막걸리를 산다.
“약수동에서요. 그때 도루묵구이를 안주로 팔았잖아요. 근데 저희에게 왜 안 주셨어요?” “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손님에게 팔아야지. 너희들이 다 먹으면 장사는 어떻게 하니?” “약수동에서요. 왜 경찰차에 실려 간 적 있으셨잖아요.” “그것도 잘 모르겠다. 경찰서에 간 것 같긴 한데….”
어머니의 빈 잔에 막걸리를 따라 드리고 내 잔에도 가득 채운다. “그래도 약수동에서 너희들 키우며 살 때가 좋았단다. 그때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잘 못 먹이고, 잘 입히지 못해 미안하구나.”
내 고향은 약수동이다. 그곳에는 악착같이 네 남매를 키우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있다. 오늘따라 어머니와 마시는 막걸리 맛이 일품이다.
- 글 진우석_ 여행작가. 시인을 꿈꾸었으나 여행작가가 되었다. 걷기를 좋아해 세계의 길을 찾아다니고 있다.
- 그림 김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