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이 뼈저리게 환기되는 때다. 은유와 상징 또는 유희가 중심이 되는 연극만 선보이기에 ‘헬조선’으로 축약되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버겁다. ‘무브먼트 당당’의 김민정(43),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의 이경성(33),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구자혜(34)같은 연출자가 더 귀한 이유다. 이들처럼 현실을 그로테스크하게 전시(김민정)하고 세밀하게 기록하며(이경성), 재기발랄하게 풍자(구자혜)하는 연극인이 드물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공연장 내에서 그린 세밀화는 이를 지켜본 뒤 공연장문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풍경화로 탈바꿈된다.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가 2016 시즌 주제기획전 <귀.국.전(歸國展)>의 연출자로 세 사람을 초대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 김 연출의 <불행>(4. 7~10)은 이 시대의 불행을 공연장 곳곳에 나열하며 대한민국의 불행한 현실을 모자이크처럼 직조해낸다. 이 연출의 신작 <그녀를 말해요>(4.14~17)는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엄마가 등장한다. 딸의 부재와 함께 사라진 하나의 세계에 대해 기록해나가며 앞뒤 맥락을 세심하게 파악해나간다. 구 연출의 < commercial, definitely-마카다미아, 검열, 사과, 그리고 맨스플레인 >(4.21~24)은 한국 사회를 폭로한다. 독일 샤우뷔네 극단의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등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핫한 스타일을 끌고 들어와 풍자의 끝을 보여준다.
‘귀국전’이라는 타이틀은 앞선 세대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예술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때 사용됐다. 이번 남산예술센터의 <귀.국.전>에 참가하는 세 연출은 해외에서 멋스럽게 금의환향한 이들이 아니다. 골방 또는 연습실 또는 소극장, 즉 허름하고 작은 곳에서 바라본 고국에 대한 이야기다. 남산예술센터는 “이들 눈에 비친 고국은 불행하고, 슬프고, 폭력적이다. 하여, 이들의 작품을 보호할 타이틀로 한국 예술사의 어느 한때,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는 ‘귀국전’이라는 말을 차용한다”고 전했다.

젊은 연출가의 언어로 그려질 ‘지금, 한국 사회’의 불행

세 연출은 지난 1월 제작발표회에서 박근형, 고선웅, 장우재 등 올해 남산예술센터 시즌을 장식하는 쟁쟁한 연출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때도 당당하게 빛을 발했다. 공교롭게도 남산예술센터 이번 시즌 개막작으로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올린 박 연출을 비롯해 고 연출(<한국인의 초상>), 장 연출(<환도열차>) 역시 지금 대한민국의 불행을 저마다의 방식과 통찰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세대와 묶여도 뒤지지 않는 존재감과 함께 이 연출, 구 연출 같은 신진들과 엮여도 모자라지 않는 신선함의 김 연출은 “동시대의 작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귀국전>에 대해 “다른 종류의 여러 연극 작업을 묶는 것인데 다들 결이 달라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불행>은 이미 지난해 ‘제22회 베세토 페스티벌’을 통해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됐다. 프로시니엄 무대와 이 무대보다 객석이 높은 원형 공연장 형식의 객석이 뒤섞인 이곳의 특성을 살렸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새로 정의해 호평받았다. 짐승의 가면을 쓴 이들이 무대와 객석 상관없이 곳곳에서 불행한 사건에 맞닥뜨린다. 관객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리 잡거나 곳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불행의 크기와 무게, 그리고 질감이 달라진다. 김 연출은 “이미 형식이 만들어져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그 공간을 채우는 내용의 밀도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 연출의 <그녀를 말해요>는 지난해 그의 신작 <비포애프터>의 연장선 격이다. 역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비포애프터>는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뽑은 ‘올해의 연극 베스트3’, 한국연극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한국연극>의 ‘2015 공연 베스트7’, 대한민국연극대상 신인연출상 등을 휩쓸었다. <비포애프터>가 여러 인물의 기억을 통해 거시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모순을 까발리는 묘를 발휘했다면, <그녀를 말해요>는 좀 더 내밀한 시간을 끄집어낸다. 이 연출을 비롯해 배우들은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엄마’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인터뷰해왔다. 한 가정에서 약 18년간 자라며 겪었을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조심히 수집해왔다.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한 세계의 축을 담당한 이야기가 연극화되는 걸 알고 있다. 개인의 내밀한 방식인 기억이 예를 갖춰 사회적으로 승화될 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연출은 “<비포애프터>를 시작할 때 세월호가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며 “그런데 그 자체에 갇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이 적확할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의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을 다룰 때 당사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는 이야기를 개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공동체의 상처에 대해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덧붙였다.
구 연출의 는 지난해 그가 동인으로 활약 중인 ‘혜화동1번지 6기’의 가을페스티벌 ‘상업극’에서 초연했다. 당시 ‘마카다미아, 표절, 메르스 그리고 맨스플레인’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담아 ‘검열, 사과’를 ‘표절, 메르스’에 대신했다. 대학로에서도 가장 작은 소극장으로 통하는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50석)에서 공연한 이 작품의 성격이 중극장 규모의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450석)에서 공연됐을 때 어느 정도 환기될지 기대를 모은다. 최신 공연계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며 ‘상업성’이 짙은 작품을 표방하나, 그 이면을 탐색하게 한다.
공공극장 또는 국공립극장에서 연출하는 건 처음이라는 구 연출은 “는 표면, 즉 껍데기가 중요한 공연인데 홍보부터 예술적으로까지 상업적일 수 있는 의미가 담긴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하게 돼 흥미롭다”고 말했다. 극은 초반에 영상 등을 통해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와 남산예술센터의 객석 수를 비롯해 제작비 등 각종 여건을 직접적으로 비교한다. 그녀는 “작년 공연은 상업적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면, 올해는 비로소 상업극이 됐다”며 “제작비가 몇 배 늘었다는 등의 내용을 명시하면서 상업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나타내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한국연극사·현대사의 상징적 공간 ‘남산예술센터’의 의미

<불행>은 이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를 작년부터 터전으로 삼았으나 <그녀를 말해요>와 는 소극장 작품을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무대로 확대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연출과 구 연출의 작품은 작년 발언의 주제를 변주한 재창작 작업으로 정의할 수 있다. 는 ‘메타연극(meta theatre)’, 즉 연극에 대한 연극이다. 구 연출 역시 그래서 “자기 반영성이 강하다”고 했다. “연극판에는 소위 말하는 연극, 극단에 대한 계급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거기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비루한 혜화동1번지는 극장 자체가 무대였다”고 말했다.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는 이번 버전에서 무대는 개념이다. “국공립단체, 공공단체를 뭉뚱그려서 나타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연극인들이 봤을 때 이미지를 다루고 싶다. 일반적인 국공립단체와 다른, 두산아트센터와는 다른, LG아트센터와는 다른, 대학로 소극장과 다른 남산예술센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활용해서 구현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앞서시즌 라인업 발표 때 우연 극장장은 구 연출이 남산예술센터에 대해 마음껏 비판해주기를 바랐다. 구 연출은 “비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비판하는 것이 수단이 돼서 이곳에서 지원금을 받고 연극을 만들고 평가를 받는 것이 관객을 만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엄청있어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는 연극”이라고 소개하며 웃었다. “소위 ‘있어 보인다’는 포장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는 관객들이 시선이 내리꽂는 구조라 빈 그릇 등 상상을 담지 않은 결핍의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이 연출이 이곳에서 선보인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 역시 메타 연극에 가까웠다. 1962년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가 개관한 이래 이 극장에서 만들어진 연극과 사건들, 사람들의 자취를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보이며 연극에 대한 연극을 제대로 보여줬다. 극작가 유치진이 주축이 돼 세운 드라마센터는 <햄릿>을 시작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 <포기와 베스> 등을 공연했으나 1963년 재정난으로 1년여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결혼식장, 미8군 공연단의 재즈 공연장, 영화 상영관 등으로 사용되며 극장 본연의 목표를 잃어버린 듯했다. 남산은 현재 데이트 장소나 산책 코스로 주로 연상되나 1960~70년대에는 어둠과 침묵의 이미지가 강했다. 드라마센터에서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진 지금의 서울유스호스텔 건물은 당시 안기부의 남산 본관, 서울종합방재센터는 유치장, 대한적십자사 건물은 안기부의 행정과 감청이 이뤄진 곳이다. TBS 교통방송청사는 감찰, 수사, 행정이 종합적으로 행해진 건물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유덕형의 <초분>, 오태석의 <태>, 안민수의 <하멸태자>, 이상우의 민족 마당극 <장산곶매> 등 한국 현대 연극사에 방점을 찍은 작품들을 공연했다. 이 연출은 “<남산 도큐멘타>가 주목한 지점은 극장 안에서 급진적인 연극이 공연되고 있는데 옆 건물에서는 상반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부분이다. 그런 극적인 부조리로 극장 안의 연극과 세상의 실제 일들이 충돌하고 만나는 지점이 바로 드라마센터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구조라 생각했다”고 알렸다. 그러니 당시에는 “굳이 무엇인가 다른 세팅을 하지 않아도 됐다”고 했다. 이번에는 “작품의 주제적인 맥락에 맞는 최적의 디자인이 무엇이고 극장 안의 구조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 중”이라며 “무엇보다 그간 생각해온 막연한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고 퍼뜨릴 수 있는 통로가 생겨 반갑다”고 말했다.
이미 남산예술센터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한 김 연출은“예전에 지어진 공간에서 동시대 지금의 연극을 해야 하는데, 극장 공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 중이다. 그런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각자의 지옥을 사는 지금, 연극이란

이경성 연출이 지난해 선보인 신작 <비포애프터>의 한 장면.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4월에 남산 무대에 오르는 <그녀를 말해요>는 이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에서는 공연 장르를 담는 극장이 모바일, TV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매체가 있음에도 모든 목소리를 내는 대신, 자극적인 것에 편향된 목소리가 쏟아지는 이때 연극은 하나의 ‘대안 미디어’ 역을 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 연출은 “우리 작품을 보는 관객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우리 내부 사람들, 주변 사람들, 이것에 관심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000만 명이 보는 영화와는 다른 위치에서 다른 의미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 연출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배우가 그녀에게 “네가 연극이라도 하고 있으니 연출이라도 맡고 있지. 다른 곳에 있었으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겠냐”라는 말에 정말 제대로 공감했다며 연극을 하는 이유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았다. “우리 공연이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다. 짓궂고 까불고. 근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한 땀 한 땀 개념을 세우는 작업을 한다. 그게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연극을 하기 때문에 사회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이 연극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연극을 해서 관심이 생기고 더 고민한 것을 알리고. 그렇게 즐기는 것뿐이지 경쟁은 없다”고 했다. 다만 “면 대 면으로 이야기해도 부담스러워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데 공연을 직접 와서 본다는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힘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연출이 연극에 대해 기본적으로 생각한 것은 “좀 더 좋은 삶을 최대한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매개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결국은 “삶이 연극보다는 우선돼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연극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고민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내가 정말 그런가 계속 생각해보고 있다. 오히려 이런 당위적인 명제로 나를 속이지 않는지도 생각해보고. 연극이 다른 매체를 좇아가려고 할 때 오히려 연극이 가지고 있는 걸 못 할 수 있다. 연극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면, 내 주변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이 순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세 연출처럼 삶과 연극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해나가는 이들이 있어도 삶은 여전히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김 연출은 “하나의 메시지, 명제를 가지고 조금 더 발버둥 쳤지만 ‘불행’이 그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 사회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의 미학적인 성취를 내세우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구 연출은 그것이 안 되는 사회라 “짜증이 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서”라고 말했다.
이 연출은 현재 한국 사회 전체가 큰 지옥이 아닌 “각자만의 지옥이 만들어져 그것이 모인 듯하다”고 봤다. 그래서 “연극이 이런 딴 세상들을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각자의 위치에서 따로 또 같이 하는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극장 안에서 연극을 하는 동시에 극장 밖에서는 그에 따른 구체적인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두 과정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녹록지 않다”고 했다. “극장 안과 극장 밖에서 내세우는 지향점이 일치하지 않으면 둘 중에 하나는 가짜가 되는데 그 경계에서 계속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출가들에게 이번 ‘귀국전’은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출국 전(前)’ 발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