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이것은 예배 준비를 위해 열심인 곳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는 교회의 예배 형식을 그대로 연극에 들여왔다.
※본 공연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변경 또는 취소될 수 있으니 정확한 일정은 남산예술센터 누리집(www.nsac.or.kr)을 통해 확인 바랍니다.
‘대부흥’ 전에 짚고 가야 할 것들
오는 9월 무대에 오를 예정인 연극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의 런 스루(전막연습)가 진행된 8월 어느 날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를 찾았다.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와중에도 연습 현장은 이리저리 분주한 배우들 덕에 활기가 넘쳤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는 한국 기독교 보수화의 역사와, 이와 유사하게 흘러간 남산예술센터의 성장 과정을 함께 조명하는 작품이다. 남산예술센터는 동랑 유치진이 설립한 공공극장이지만, 현재 소유권은 서울예술대학교(이하 서울예대)에 있고 서울문화재단이 임차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예대 측에서 계약해지를 통보한 이후 극장 소유권 논란은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 서울예대 설립자인 유치진이 1960년대에 정부 땅을 특혜로 불하받아 극장으로 쓴 과거사 또한 남산예술센터 소유권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거리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뿌리부터 시작해 그것이 국내 보수 세력과 결집하게 된 연유를 배우의 대사를 통해 밝히고, 이는 곧 남산예술센터의 성장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보여준다. 그렇게 그 본질을 잊고 부패한 기관들의 각성을, 예배의 형식을 빌려 촉구한다. 그리고 참회를 구한다. 극장,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권력화된 부분을 바로잡고 나서야 ‘대부흥’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퀴어와 기독교, 그리고 한국 사회
사실 극 중반부 이후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바로 ‘퀴어 예수’다. 그는 성경에 나온 예수의 생애, 즉 이 땅에 내려와 핍박을 받으며 죽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지만 ‘여자’를 사랑하지도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자신과 같은 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라 할지라도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갖지 않는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예수가 퀴어라고?”라며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행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보수화된 기독교에서 가장 배척하는 대상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기독교가 주창하는 ‘사랑’ ‘박애’ ‘관용’과 같은 개념이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극 중간 중간에는 ‘육우당’이라는 인물이 쓴 시와 글이 인용돼 대사와 함께 낭독된다. 육우당(본명 윤현석)은 동성애자인권연대에 가입, 학생 신분으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하다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다”며 2003년 18세의 나이로 목숨을 끊은 청년이다. 육우당의 글은 연극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중심을 잡아주는 하나의 푯대다. 육우당의 유언이 낭독될 때, 그가 이 사회에 외치는 메시지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연극
임성현 연출은 연극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제의성과 예배의 형식적인 특성의 교집합을 찾아냈다. 연극 또한 제의성을 가지고 있다는 설이 있고, 예배에도 어딘가 ‘퍼포먼스’적인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언가를 앞에서 한다는 것. 무언가를 공유하고 약속하고 나누고 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연극이랑 비슷하다고 느꼈다. 덧붙여 일방적인 예배 방식보다는, 연극에서만큼은 재미있고, 관객이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원형극장은 예배당으로 변하고, 무대에는 성가대도 함께한다. 또한 SNS로 모집한 100명의 영상 합창단도 함께할 예정이다. 성경 말씀이나 익숙한 찬송가도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의 전막연습을 보고 난 후에 가장 인상 깊게 남는 건, 찬송가가 아니라 극 중 배우들이 춤을 추며 함께 부른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 중 “I’m on the right track baby(난 제대로 가고 있어). I was born this way(난 이렇게 태어났어)”라는 노랫말이다. 이 연극에서 말하는 ‘퀴어’가 성소수자만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이해된다. 이 정도면 모든 소외된 곳, 변두리에 있는 이들,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는 이들이 조그마한 ‘유대감’이라도 얻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는 연출가의 작은 바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 글 전은정_객원 기자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