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통로 찾기<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 지음, 난다
소설가 정세랑은 2010년 1월 장르소설 월간지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장르소설 작가로 등단했다. 외계인을 등장시킨 <지구에서 한아뿐>과 퇴마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보건교사 안은영> 등 지금까지 자신의 특기인 장르문학적 성격을 순수문학에 결합시킨 작품들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문학 장르를 구축해왔다.
그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덧니가 보고 싶어>는 이런 ‘정세랑식 문학’에 첫 시동을 건 작품이다. 신작이 아니다. 8년 전 발표됐던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내용도 단순하다. 사랑도, 결혼도, 일도 제대로 못하는 두 남녀의 연애 이야기다. 소설이 단순한 연애 이야기로 끝났다면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정 작가는 여성 스토킹, 쓰레기 문제 등 사회적, 환경적 이슈에 대한 고민을 소설 속에 던진 뒤 특유의 경쾌한 화법으로 하나씩 풀어간다. 그 고민은 모두 실제 작가 자신의 일상을 조금씩 파고드는 ‘두려움’이었다.
이 책에 생명을 불어넣은 부분은 ‘액자식 구성’에 있다. 각 장에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어떤 장에는 얼음여왕과 물고기왕자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을, 또 다른 장엔 인간을 닮은 로봇과 우주여행 크루즈가 등장하는 SF소설을 집어넣었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조선 민담도 나온다. 재밌는 건 소설가인 여주인공 ‘재화’가 이 짧은 소설들 속에 이미 헤어진 남자친구 ‘용기’를 갖가지 모습으로 등장시키는 부분이다. 소설 속 용기가 죽을 때마다 실제 현실 속 용기의 몸엔 각 소설에 나왔던 문장 일부가 문신처럼 새겨진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재화가 용기를 죽인 것은 미워했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그리워했기에 그런 식으로라도 소설 속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장르소설에 대한 문단의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에 등단 이후 10년 가까이 이렇게 작품 속에 장르적 분위기를 녹여냈다. 그러면서도 순수문학이 지향하는 인간에 대한 질문과 사회적 메시지도 놓치지 않았다.
정 작가는 말했다. “흡수가 잘되는 문학을 해왔는데 여전히 싫지 않네요. 주제에 따라 우리 피부에 닿아야 할 이야기엔 주류문학을, 잠시 멀리 떨어져야 할 땐 장르문학을 쓰는데 아직까지는 양쪽 모두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섞어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 대중문학 작가가 되는 게 꿈입니다.”
걷기는 힘이 세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문학동네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를 비롯해 혜민 스님 에세이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등 지난해엔 유독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하는 에세이들이 연이어 출간됐다. 그 가운데 배우 하정우가 쓴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는 2018년 11월 출간된 이후 줄곧 서점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꾸준한 인기에 온라인서점 알라딘은 ‘2019 올해의 책’으로까지 선정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당시 ‘그래, 어디 그 멋 부린 글 솜씨 한 번 볼까’ 하는 삐딱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는 책 표지 안쪽에 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는 자기소개 뒤에 ‘걷는 사람’을 집어넣었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 큼직한 차를 타고 여유 있게 다닐 것 같았던 그가 사실은 허름한 모자를 눌러쓰고 한강 산책로를 걸으며 출퇴근하고 있을 줄은 책을 읽기 전까지 미처 몰랐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걷기는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걷기가 그의 일상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알게 됐다.
책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곧바로 운동화를 사러 갔다. 부러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말한 기분을 한 번 느껴봤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일주일 후 만난 친구 역시 정장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너도 혹시 그 책 읽었니?” 끄덕이는 친구와 한참을 웃은 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대신 함께 걸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걷기를 통해 보여준 ‘실천 의지의 재발견’이다. 읽는 내내 인기 배우에 대한 동경 대신 ‘맞아. 나도 할 수 있었어. 그래 사실 별거 아니었지’라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가 보여준 실천 의지는 걷기에도, 인생에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배우로서 화려한 삶을 살 줄 알았던 그가 책에서 보여준 모습은 종종 크고 작은 실패도 하고, 사실 별것 아닌 것을 고민하고 주저하는 미완의 인간이었다. 영화감독이 돼 만든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해외 개인전을 앞두고 완성하지 못한 작품 수에 ‘아 난 항상 왜 이 모양일까’라며 밤새 안절부절 못하며 자책한다. 러닝머신 앞에서 ‘뛸까 말까’ 주저한다.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한 인간이었다.
그렇게 힘들 때마다 하정우는 더 걸었다고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그에게 걷기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삶의 한 과정이었다. 그는 말한다. 단순한 행동은 힘이 세다고. 그러하기에 ‘걷기’라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생각의 단계 역시 단순화하라고. ‘당장 걸으러 나가보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운동화를 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책이 가진 힘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묵묵히 어느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는 하정우를 만날 수 있을지.
- 은정진_한국경제신문 기자
사진 제공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