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진 개인전 <파편> 설치 전경.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제공)
도자로 만들어낸 겨울 숲
백진 개인전 <파편>(Fragment) 2019. 12. 13~2020. 3. 8,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얇은 종이가 층층이 쌓여 기둥을 이뤘다. 그러나 이것은 종이가 아니다. 얇디얇게 빚어낸 도자기다. 종이의 숲이 아니라 도자의 숲이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는 도자라는 전통매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다양한 작업으로 선보이는 작가 백진의 개인전 <파편>(Fragment)을 개최한다. 그의 작업은 꾸준한 실험의 결정체다. 얇은 도자는 쉽게 깨질 것처럼 보이나, 생각보다 견고하다. 1,200℃까지 올라가는 전기가마에서 두세 번 구워냈다. 굽는 과정에서 절반 정도는 깨지지만, 남은 것들은 더욱 단단해진다. 종이나 천처럼 부드럽고 가벼워 보인다.
수많은 흰색 도자 파편을 마치 퍼즐을 맞추듯 화면에 배열한 <공(空)> 시리즈, 긴 띠가 서로 엉켜 형상을 이룬 <간(間)> 시리즈는 마치 회화처럼 보인다.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들어낸 푸르스름한 흰색은 맑고 깨끗하게 다가온다. 그림자가 도드라져 조각의 굽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이라이트는 기다란 도자 파편을 기둥처럼 높이 쌓아올린 <무제>다. 자신만의 ‘레시피’로 제조한 백토(白土)물을 굳혀 만든 얇은 판을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낸 후, 이를 구부리거나 동그랗게 말아 전기가마에서 구워냈다. 벌어지고 깨지고 휘고 덜 휜 파편을 잘 골라내 차근히 쌓아올렸다. 겨울을 맞아 앙상한 가지만 남은 자작나무들이 전시장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무제>는 현재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IFC Seoul)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 <화이트>(Whites, 2012)에 이어 작가가 두 번째로 시도한 3차원 설치 작업이다. 당시엔 도자는 무거울 것이라는 무게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천장에 매달았다면, 이번엔 높이 쌓아올렸다.
작가의 바람처럼 흙이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미술관 측은 “도자라는 매체가 갖는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2 <깊이 - 사슴 연못>(Depth - Deer’s Pond), 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
116.8×80.3cm. (학고재갤러리 제공)
디지털 시대의 회화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 2019. 12. 11~2020. 1. 12,
학고재갤러리 신관
회화작가 박광수의 그림은 ‘숨은그림찾기’ 같다. 하얀 캔버스 위 단순한 검은 선으로 형상을 만들어내는데, 전체 형상의 어딘가에 주인공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연못이 있는 산의 풍경을 그린 <깊이사슴 연못>엔 정말 사슴이 있고, <두루미의 숲>에는 두루미가, <부엉이의 밤>에는 부엉이가 있다.
신작인 <깊이?스티커>(2019)는 인물의 형상이 도드라진다. 기억을 더듬어 끄집어낸 듯 희미하고도 거대한 인물 그림자가 정면을 응시, 관객과 시선이 맞닿는다.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지, 그림이 나를 바라보는지 모호하다. 흐릿한 원경의 인물과 대조적으로 근경의 도형들은 작고 또렷하다. +, -, × 등 수많은 수학 기호와 부호들, 숫자들, 알 수 없는 알파벳과 한글이 뒤섞여 흘러내린다. 작가는 “거울 표면에 붙은 스티커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자 뒤에 비친 사람의 형상이 흐릿해진 것에 착안했다”고 말했다. 거울 표면과 그것이 투영한 인물의 환영은 겹칠 듯 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다. 하나가 선명해지면 다른 하나는 흐릿해진다. 마치 어릴 적 하고 놀던 ‘매직아이’처럼.
대작인 <큰 여울의 깊이>(2019)는 고향인 철원의 한탄강을 주제로 제작했다. ‘큰 여울’은 한탄강의 옛 이름이다. 겉은 잔잔해 보이나 유속은 매우 빠른 한탄강은 실제 많은 인명사고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유속이 빠른 한탄강을 모티브로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냈다. 일상의 풍경이 사라지고 공상의 세계로 넘어가면서 화면 속 세계가 확장된다. 사람의 얼굴, 철도, 아파트 등 빠른 유속을 타고 확장하며 또 사라진다. 디지털 시대의 회화다.
- 글 이한빛_헤럴드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