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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OCIATED

11월호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한국의 <휴먼 푸가>와 폴란드의 <The boy is coming>당신은, 나와 같은 인간인 당신은
나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습니까?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두 편의 공연이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폴란드에서 각각 제작됐다. 2019년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으로 11월 6일 개막하는 연극 <휴먼 푸가>와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이 제작한 <The boy is coming>이 그것. 남산예술센터는 이 우연의 일치를 기념하기 위해 내년 5월과 10월을 목표로 두 작품의 교류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월,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연극 <휴먼 푸가>를 준비하던 중 광주에 다녀왔다. 녹음이 푸르던 자유공원에서 본 으깨어진 시신들의 모습이 며칠이고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이제는 너무 잔혹해서 어두운 방 안에서만 보게 해둔 사진들. 시신이 소각되었다고 전해지는 국군통합병원의 보일러실, 실려와 격리된 채로 치료 아닌 치료를 받으며 더욱 내면으로 침잠했다고 하는 병동들. 광주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못했다. 많이 듣고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말은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휴먼 푸가>는 준비할수록 두려운 작품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말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무대 위로 올릴 수 있을까, 아직 ‘그자’가 살아 있고, 여전히 그 상처가 진행 중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을 말해야 할까.

<휴먼 푸가> 공연 연습 모습.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

<휴먼 푸가>는 작년 겨울 남산예술센터와 첫 만남을 가졌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이하 뛰다)가 2019년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 공모에 응한 덕이었다. 읽을수록 고통이 몸에 새겨지는 소설 <소년이 온다>를 어떻게 남산의 무대 위에 올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그래서 ‘말로 할 수 없는’ 광주를, 뛰다이기 때문에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우의 몸과 소리를 탐구하고, 광대와 오브제에 대해 연구하며,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연극 형식을 실험해온 극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뛰다의 배요섭 연출은 <휴먼 푸가>를 설명하며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지 않는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11월 6일 개막하는 <휴먼 푸가>를 올 초부터 준비했다. 보통 작품 연습 기간이 3개월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흔치 않은 일이다.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광범위한 리서치, 토론, 연습이 계속됐다. 연기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행위를, 말과 몸을 일치시키지 않고 오히려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내는 훈련을 했다. 광주를 통해 배우 각자가 경험한 것을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도 광주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안고 출발한다. 그래서 소설에는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돌보고, 마지막 날까지 도청에 남기로 결정했던 ‘소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너’라는 2인칭으로만 호명된다. 소년은 호명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존재다. 소설은 커다란 사회적 상처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며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들을 수 있는지 묻는다.
<휴먼 푸가> 역시 소설을 서사화하여 극화시키지 않고 말과 몸을 분리하는 실험을 했다. 재현 ‘불가능성’을 살펴보는 그치지 않고 질문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딜레마 안에서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 ‘인간은 악한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것이 <휴먼 푸가>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신문을 통해 <소년이 온다>의 다른 공연 소식을 알게 됐다. 한강 작가가 <휴먼 푸가>에만 저작권을 허했다고 알고 있었기에 놀랐다. 그리고 폴란드에서 폴란드 연출이 폴란드 배우들과 함께하는 공연이라기에 놀랐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폴란드의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Marcin Wierzchowski) 연출이 <소년이 온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아 5·18기념재단에 연락했고, 그곳에서 한강 작가와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한강 작가는 고심 끝에 공연권을 허가했는데, 폴란드 레지던시 체류 경험과 더불어 폴란드 역시 거대한 폭력 아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등이 그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1 1781년 설립된,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스타리 국립극장.
2 <The boy is coming> 포스터를 배경으로 한 기념 사진.

광주의 비극에 폴란드의 두려움을 이식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한국과 폴란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준비되는 것을 보며 극장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 공연을 두 나라에서 함께 선보이면 어떨까, 한강의 작품이 어떻게 무대화되는지 함께 지켜보면 어떨까, 폴란드는 광주를 어떻게 말할까.
동시대, 실험, 초연을 브랜드로 삼는 창작초연 중심 제작극장 남산예술센터의 무대에 외국 작품이 오르는 것은 지난 10년간 손에 꼽을 만큼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년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는 사실도 폴란드 행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폴란드 문화부 산하 예술지원기관)과의 소통도 빠른 결정에 큰 힘이 됐다. 그렇게 말로서가 아니라 직접 공연을 보고 논의하기 위해 극장과 뛰다의 배요섭 연출이 10월 초 폴란드에 다녀왔다.
<소년이 온다>의 폴란드 공연 <The boy is coming>(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 제작,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 연출)은 장장 5시간 동안 진행된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장별로 구성하고, 2부에서는 폴란드의 현실을 반영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공연은 1781년 설립된,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스타리 국립극장의 8군데 공간 사이를 이동하며 진행됐다.
<The boy is coming>은 우리가 지난 1년 여간 고민해왔던 지점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무대에는 동호가 등장했고, 에필로그에 엄마의 입을 빌려 잠깐 존재했던 동호의 두 형도 무대에 섰다. 정미 누나가 상무관에 있었고, 정대의 몸이 높게 쌓아올려졌다. 그래서 이 공연을 한국의 관객들과 함께 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잠깐 들었다.
마르친 연출은 이 공연을 ‘두려움’(fear)이라고 설명했다. 2부에서 그리는 두 가족의 이야기는 2028년, 아직 도래하지 않은 폴란드의 미래인데, 극 중에서는 2021년 12월 폴란드에 어떤 ‘큰 사건’(광주와 같은)이 일어난 것으로 가정한다. 폴란드의 현실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두려움을 극으로 들여온 것이다. 나날이 우경화되고 민족주의가 심해지고 있는 동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했다. 그는 “5년 전의 폴란드에서는 광주와 같은 폭력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국가 폭력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고 했다.
<The boy is coming>은 <소년이 온다>를 세밀한 서사적 구조로 전달하며 폴란드의 혼란한 상황 안에서의 두려움을 ‘그대로’ 전해 경고해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를 드러낸다. 이국의 광주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그 두려움을 폴란드의 것으로 이식한다.

3 폴란드의 <The boy is coming> 공연 모습. (스타리 국립극장 제공)

경계를 넘어 던지는 질문

<휴먼 푸가>라는 제목은 같은 음이 계속 반복되어 변주되는 음악의 구조 ‘푸가’(fuga)에서 빌려왔다. 1980년 광주에서의 큰 폭발이 개인에게 피폭되었고,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통해 계속 변주되면서 이어진다. ‘피폭’으로 표현되는 거대한 폭력과 그로 인한 죽음은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고통은 개인의 고통으로 내면화되고, 개인의 고통은 다시 사회로 환원된다. 그래서 우리 모두도 평화로운 일상에 떨어진 사회적 폭력을 바로 응시하고 들여다보는 일을 나눠 갖는다.
남산예술센터는 2020년 5월과 10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두 작품의 공연 교류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광주-폴란드 크라쿠프를 잇는 공연을 협의하고 있는 두 작품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가며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에 앞서 폴란드의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 연출이 11월에 서울을 방문한다. 11월 9일 <휴먼 푸가> 오후 3시 공연이 끝난 후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휴먼 푸가>의 배요섭 연출과 만나 광주를 어떻게 무대에서 발화하는지 소개한다. <휴먼 푸가>의 관람객은 누구나 참석 가능하다.

글 송서연_남산예술센터 기획제작 PD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스타리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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