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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백남준 <다다익선> 복원 계획을 둘러싼 논란<다다익선>의 브라운관 보존은 과연 ‘원형 유지’일까?
9월 11일 국립현대미술관(이하 MMCA)이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1988)의 보존 방향을 발표했다. <다다익선>은 1986년 MMCA 과천이 개관하면서 설치된 모니터 1,003대, 높이 18.5m의 작품이다. 지난해 2월 브라운관(CRT) 모니터가 노후해 화재 위험 및 안전성의 문제로 가동이 중단되면서 보존, 철거, 혹은 오마주 작품 제작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1년여의 시간 끝에 MMCA는 “CRT가 탑재된 원형 유지를 기본 방향으로 보존하며, 2022년 전시 재개를 목표로 3개년 프로젝트를 가동한다”는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CRT 보존을 MMCA의 말처럼 ‘원형 유지’라 볼 수 있을까?

‘원형 유지’ 결론이 나온 배경

MMCA는 국내외 전문가 40명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 중에는 독일 카를스루에에 있는 예술과 매체기술 센터(ZKM),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관계자, 이숙경 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이지호 전 이응노미술관장,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 등이 포함됐다. 결과는 ‘LED 등 신기술로 교체’(23명), ‘CRT 유지’(12명), ‘기타’(5명) 순이었다. ‘소멸하도록 두자’거나 ‘완전히 해체, 보관하자’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신기술로 교체하자는 것이 우세했지만, MMCA는 CRT 유지를 택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복원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원형 유지’이며 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술관의 임무다. 작품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대성을 반영한다. <다다익선>의 CRT 모니터는 20세기 대표 매체로 미래에 20세기를 기억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에 CRT를 최대한 복원해 작품의 시대적 의미와 원본성 유지에 노력할 것이다.”그러면서 MMCA는 동일 기종 중고품을 구하거나 수리하고, CRT 재생기술 연구를 도모하겠다고 했다. 이런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경우 LCD(LED), OLED, Micro LED 등 최신 기술을 부분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2022년 전시 재개를 목표로 2020년부터 3개년 중장기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될 예정이다. 추정 예산은 30억 원, 모니터의 예상 수명은 10~15년이다.

<다다익선>의 원형은 브라운관인가, 영상인가

MMCA는 브라운관 보존을 ‘원형 유지’라고 밝혔지만, 예술 작품의 속성을 따져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다다익선>이 단순한 조각 작품이라면 브라운관이 ‘원형’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영상과 작동 소프트웨어가 주인공인 ‘미디어아트’다. 통상 예술작품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관의 의사가 아닌 ‘작가의 의도’다. 작고 작가의 경우 유족이나 저작권자의 의견을 듣는다. <한겨레>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MMCA 측은 저작권자인 켄 백 하쿠타(백남준의 장조카)에게 가장 먼저 접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자문 요청을 받은 미국 큐레이터들이 켄 백에게 ‘내가 답해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두 달이 지나서야 공문을 받은 켄 백은 잘못된 순서에 불쾌함을 느껴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MMCA는 저작권자의 답 없이 자체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저작권자와 접촉이 어려웠다면 그다음엔 최소한 작가의 의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
백남준은 이미 1988년 <다다익선>을 설치할 때부터 이 작품의 수명이 10년을 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교체해도 좋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으며, 심지어 서울시립미술관에 설치된 <서울랩소디>를 작업할 때는 LCD 모니터를 사용했다. 또 2003년에는 <다다익선> 설치 과정을 함께한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에게 “after service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친필을 팩스로 남겼다. 이 대표는 평소 “백남준 작품의 핵심은 곡면 브라운관이 아닌 영상”이라고 밝혀온 바 있다. 그런데 미술관이 임의로 ‘CRT도 시대성을 반영한다’고 결정 내린 것이다. 이 대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 유지는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몇 년 뒤에 시한이 다할 바보 같은 짓을 왜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이 고장 나고 수리하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미디어아트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베른하르트 제렉스 전 ZKM 수석큐레이터도 “1988년의 TV가 보존되지 않았는데, 맞지 않는 기술에 고군분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단기적 해결책이자 헛된 절차”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1 1987년 <다다익선> 설치를 구상하는 백남준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 1988년 일반 공개 당시 <다다익선>의 모습. 이때도 백남준은 작품의 수명이 시한부임을 알고 있었고, 시한이 다하면 새 기술을 사용해도 좋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현대미술관답지 않은 보수성 아쉬워

MMCA는 왜 작가의 의도와 다수 전문가의 조언을 뒤로한 채 ‘브라운관 유지’를 발표해야 했을까? 그 선택에서 느껴지는 건 변화를 피하려는 극도의 보수성이다. 먼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절반 이상을 LCD로 교체하겠다는 발표를 한 뒤 후폭풍을 감당하기보다,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고자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전문가 의견 중 보수적인 의견을 취사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가장 유연한 모습으로 사회에 영감을 주는 것이 현대미술관의 역할임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아쉬운 모습이다. 예술을 향유할 먼 미래의 국민까지 고려하는 거시적인 시각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다익선>과 백남준의 예술성을 감당하기엔 아직 우리 사회가 준비가 안 된 걸지도 모르겠다.

글 김민_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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