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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소설가 김탁환소설가로 살아가기
소설가 김탁환이 신작 <대소설의 시대>를 펴냈다. 18세기 말의 선진적 지식인, 문필가 집단인 백탑파의 이야기를 추리적 틀에 담은 소설 ‘백탑파 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으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소설 독서와 창작을 전면으로 다룬다.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해 이곳에서 신작을 마무리한 소설가 김탁환을 만났다.

연희에서의 시간

김탁환은 연희문학창작촌에 머무르며 신작 <대소설의 시대>를 마무리했다. 지난 1월 이곳에 들어올 때 그의 노트북에는 이 소설의 ‘거친’ 초고가 들어 있었다. “초고는 일단 이야기를 끝마치는 데 의미를 두기 때문에 설렁설렁 쓰고, 퇴고할 때 훨씬 더 끌어올리는 편”이라고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소개했다. “퇴고를 일곱 번 정도 했다”고. “이런 데를 처음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데’란 문인들의 창작공간으로 제공되는 레지던시를 말한다. 원주의 토지문화관, 청송의 객주문학관, 명동 프린스호텔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작년 말쯤 자신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 독자 모임이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열려 처음 와봤는데, 깜짝 놀랄 만큼 시설과 환경이 좋아서 당장 입주 신청을 했고,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지내는 ‘집중 과정’에 뽑혔다.
그런데 그는 사실 파주에 따로 작업실이 있다. ‘연희’에 오기 전에는 그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했다. 그런데 왜 새삼?
“장편 작가로 살다 보니 혼자서 글쓰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라 섬처럼 고립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기분전환도 할 겸 동료 작가들과 어울리고 싶기도 해서 입주를 신청했지요. 입주작가들 중에는 정작 작업이 잘 안 돼서 책만 읽다 간다는 분도 있던데, 저는 정말 집중이 잘되고 좋더라고요. 아침에는 새소리도 들리고, 정말 좋은 환경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정작 이곳에서 잠을 자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는 일과를 이어가고 있다고. “너무 작업이 잘되니까 자칫 오버 페이스 하게 되겠더군요. 파주 작업실에 다닐 때는 오전에만 일했는데, 여기서는 밤까지도 작업을 할 태세여서 일부러 끊은 거죠. 장편 작가는 오버 페이스 하면 안 되거든요.”
<대소설의 시대> 앞부분에는 대하소설 <산해인연록>의 작가인 원로 여성 소설가 임두의 작업실 풍경이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다.

방문과 창문을 제외하곤, 사방 벽에 글과 그림이 가득 붙어 있었다.
(…) 왼쪽 벽은 『산해인연록』 등장인물들의 가계도였다. (…) 오른쪽 벽을 덮은 것은 초상화였다. 간단히 얼굴만 담기도 했고, 손발까지 몸 전체를 넣기도 했다. 웃고 울고 찡그리고 화내고 졸고 응시하고 눈을 감았으며, 앉고 서고 눕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비틀고 기고 돌았다. 검이나 창이나 활이나 도끼나 망치에서 거울과 빗과 부채까지 다양한 물건을 쥐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김탁환의 파주 작업실 풍경이 궁금해진다.
“임두의 작업실과 비슷하죠. 일단 이중 책장으로 사방이 둘러져 있고요. 작업을 시작하면 책장 하나를 비워서 거기다가 관련 자료들을 다 넣습니다. 논문 복사한 것 등 말이죠. 그리고 인물들 가계도도 붙이고 그러죠. 점점 기억력이 둔해져서요. 하하.”

소설을 통해 바라본 18세기의 조선, 21세기의 한국

<대소설의 시대>는 그가 ‘아름다운 장편소설의 시대’라 이름 붙인 18세기 말을 배경 삼아 여성들의 소설 독서와 창작을 전면화시킨 작품이다. 그가 2003년 <방각본 살인 사건>에서부터 이어오고 있는 ‘백탑파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백탑파 시리즈란 조선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18세기 말의 선진적 지식인, 문필가 집단인 백탑파의 이야기를 추리적 틀에 담은 소설들을 가리킨다. 규장각 서리 김진과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짝을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이명방을 화자로 삼아 서술하는 방식이 셜록 홈스 시리즈를 닮았다.
<대소설의 시대>에서도 김진과 이명방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여기서 그들이 다루는 사건의 핵심에는 소설을 읽고 쓰는 여성들이 있다. 이 소설의 장은 제1장 ‘엄씨효문청행록’에서부터 22장 ‘명주보월빙’까지 22편의 소설 제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 소설들은 거의가 여성에 의해 쓰였고 여성 독자들이 읽었을 것으로 작가는 추정한다. 이 작품에도 백탑파의 일원인 박제가가 나오고 다산 정약용도 등장하지만, “이 소설에서 백탑파는 조연일 뿐이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이 주연이며, 그런 점에서 백탑파 얘기를 쓰면서도 사실은 (남성 중심인) 백탑파를 비판한 셈”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이 소설에서 김진과 이명방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대소설’ <산해인연록>과 그 작가인 임두와 관련되어 있다.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일컬어지는 임두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은둔의 작가인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가 나이 든 여성 작가임이 밝혀진다.(수십 년째 대하소설 한 편에 매달린다는 점 등에서 그는 박경리를 떠올리게 한다. <대소설의 시대> 1권 앞머리에 박경리 <토지> 1부 자서가 인용돼 있다는 사실도 그런 연상 작용에 힘을 보탠다.) 임두는 궁중의 여인들을 위해 23년째 대소설 <산해인연록>을 써서 매달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있는데, 199권까지 잘 써오던 그가 200권째를 앞두고 몇 달째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답답해진 궁중에서는 김진과 이명방을 불러 작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을 지시한다.
특정 시점부터 임두의 소설에 오류가 있는 것을 눈치챈 김진은 작가의 치매 증상을 의심하는데, 임두는 소설의 결말을 기록해둔 수첩 ‘휴탑’을 잃어버렸음을 실토한다. 두 탐정이 수첩의 행방을 추적하는 사이 이번에는 임두가 정체를 감추고, 사라진 작가를 대신해 그의 두 제자가 <산해인연록>을 이어 써 완결하는 과정에서 휴탑과 임두의 신변을 둘러싼 음모와 비밀이 드러난다. “<산해인연록>은 물론 임두 작가님이 홀로 23년 동안 쓴 거작이지만, 그 밑바탕엔 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백 년 넘게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깔려 있다네. 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놀랍지 않은가?”
소설 초반부에서 김진이 이명방에게 하는 이런 말에 <대소설의 시대>의 주제가 담겨 있다. “남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는 구도에서, 여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는 구도로 바뀌면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다”거나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호응하며 상상의 세계가 갑자기 커진 셈”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김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요즘도 남자들 중엔 여자 작가들이 쓰는 대소설은 대충 다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라며 “남자 작가들이 인물들의 갈등을 대략 만들고 거기에 공맹의 도리를 얹었다면, 여자 작가들은 직접 겪은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해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와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나눈 대화까지, 아주 세세히 소설에 담았다네”라고 말하는데, 이런 설명과 평가는 21세기 현재의 페미니즘 문학론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선진적이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조성기의 <창선감의록>에서 보듯 처음에는 주로 남자들이 한글 소설을 쓰고 여자들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독자들이 읽어보니까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거예요. 가령 <사씨남정기>는 악한 첩을 벌하는 이야기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우유부단한 가장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거든요. 이런 식으로 여자 독자들이 남자 작가 소설에 불만을 느끼면서 여자들이 직접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그 결과 18세기 말이 되면 여자들이 소설을 읽고 쓰는 거대한 소설의 세계가 구축됩니다.”
작가는 자신이 소설에서 묘사한 18세기 조선의 풍경이 21세기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도서관 강연 등을 다녀보면 2000년대 초만 해도 청중의 30%는 남자였는데, 지금은 95%에서 100%까지가 여자입니다. 소설 독자 중 여자들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높아진 것이죠.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은 여자가 훨씬 많죠. 어떤 이는 이런 것을 두고 ‘기현상’이라고도 하던데, 실제로는 소설에서 주도권을 놓고 남자와 여자가 줄곧 부딪쳐온 거라고 봐야 할 겁니다. 18세기에 여자들이 소설 창작과 독서를 지배했다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계몽과 애국의 기치를 들고 남자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소설이 남자의 장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겁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 한글 소설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든지, 사도세자가 소설 마니아였고, 혜경궁 홍씨 자매들 역시 열렬한 소설 독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정조의 여동생들과 정조가 사랑했던 후궁인 의빈 성씨 성덕임이 한글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했다는 사실 등은 18세기 후반 궁궐을 중심으로 해 거대한 소설 창작과 독서가 이루어졌으며 그 주체는 여성들이었음을 알게 한다.

왜 그렇게 사십니까?

김탁환은 <대소설의 시대> 후기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소설로 쓰는 소설사”라 일컬었다. 18세기라는 거대한 소설의 시대를, 소설 형식에 담아 보여주었다는 뜻이겠다. 작가 후기의 첫 문장은 짧지만 울림은 무척 크다. “가지 않은 길을 걷다 온 기분이 든다.” 무슨 뜻일까. 김탁환은 소설을 쓰기 전에 연구자이자 교수였다. 비록 박사 논문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공이 바로 이 소설에서 다룬 1700년대 한글 소설들이었다. 그러나 작품 종수도 많고 분량도 방대한 그 소설들을 읽는 일이 너무도 힘겨웠다. ‘읽다가 인생이 다 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듯 연구자의 삶을 뿌리치고 나왔다.
“잘 도망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 소설들로 돌아온 셈이에요. 제가 대학 4학년이던 스물세 살 때 여기 소개된 고전 한글 소설들을 처음 만났는데, 그때로부터 30년 뒤에 그에 관해 소설을 쓰게 됐으니, 인생이 재미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뒤늦게 쓴 박사 논문이자 제 인생에서의 어떤 거대한 화해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2003년 <방각본 살인 사건>으로 출발한 백탑파 시리즈는 <열녀문의 비밀>(2005), <열하광인>(2007), <목격자들>(2015)을 거쳐 다섯번째 작품 <대소설의 시대>에 이르렀다. 권수로는 10권이고 원고지 매수로 따지면 1만 매에 이른다. 이 작품들과 함께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나, 황진이>, <허균, 최후의 19일> 등 조선 시대를 다룬 김탁환의 역사소설들을 ‘소설 조선왕조실록’으로 한데 뭉뚱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백탑파 시리즈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백탑파들이 활동했던 18세기 말은 각 분야에서 천재들이 많이 출현하고 문화적으로도 폭발한 시기였습니다. 처음 이 시리즈를 구상할 때 계획한 게 열 편인데, 이제 다섯 편을 마쳤거든요. 미술의 김홍도를 비롯해 음악과 무술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최소한 다섯 개는 됩니다. 앞으로 다섯 작품 열 권은 더 쓰고 싶은데, 그러자면 다시 16년이 걸리고 저는 일흔 살에 가깝게 되지 않을까요. 하하.” 백탑파 시리즈 말고도 그에게는 달리 큰 계획이 있었다.
“원래 계획은 50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거였어요. 연애소설도 계획에 있었죠. ‘세월호’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계획한 대하소설을 쓰고 있었을 텐데, 세월호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졌죠.” 그는 세월호 참사 이듬해 백탑파 시리즈로 세월호 얘기를 간접적으로 담은 <목격자들>에서부터 시작해 김관홍 잠수사 얘기를 쓴 <거짓말이다>, 역시 세월호 관련 인물들을 다룬 연작 소설집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논픽션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까지 네 종 다섯 권의 세월호 관련 책을 내놓았다. 세월호 5주기였던 올해 4월에는 필자가 일하는 <한겨레>의 주선으로 세월호 생존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한 글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처음에는 <거짓말이다>만 쓰고 나오려고 했는데, 김관홍 잠수사가 죽는 바람에 책을 더 쓰게 됐어요. 김관홍 잠수사처럼 절망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띄니까, 그 사람들 얘기를 더 써야겠다 싶더군요. 세월호 얘기를 쓰다 보니, 다른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메르스 사태를 다룬 ‘사회파’ 소설 <살아야겠다>를 쓴 것도 그 연장인 셈이죠.” 그는 “미뤄뒀던 대하소설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할지,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고 말했다.
문단 안팎의 교유도 활발하지 않고, 술자리도 자주 만들지 않고, 취미라고는 마음에 드는 영화를 챙겨 보는 정도라는 김탁환. 그를 보고 있으면 소설이라는 토굴에 스스로를 가둔 채 용맹정진하는 수도자를 떠올리게 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과 그 장편을 읽은 독자를 만나는 일. 장편 작가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 뒤로는 딱 그 두 가지만을 해왔다는 그에게, <대소설의 시대> 작가 후기에 나오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왜 그렇게 사십니까?
“인생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을 찾는 방법을 이것(소설 쓰기)밖에 못 배운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소설가로 사는 건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이 먹는 게 좋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데, 내가 살면서 이런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문제를 장편으로 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소설을 쓰게 되니까요. 삶의 문제와 소설의 문제가 두 겹으로 겹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글 최재봉_한겨레 선임기자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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