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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섬유작가 김태연 버려진 봉지가 소중한 물건이 되기까지
김태연 작가는 ‘어쩌다 보니’ 비닐을 재료로 10년 넘게 작업하고 있다. 생활쓰레기에서 작품이 된 비닐봉지는 전시장에 전시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패션소품이 되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환경을 생각하는 개념 있는 작가가 됐다는 그는, 그 책임의 무게를 실감하며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을 만들고자 한다.

1 2018년 개인전에서는 전시장에서 직접 작업하며 관객들을 만났다.

실이 되고 꽃이 된 비닐봉지

입시를 준비하던 1991년 가을,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홍익대 미술대학의 학과별 과제전을 챙겨 봤다. 그중 섬유미술과 전시의 큰 직물 작업 앞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태피스트리(Tapestry)였다. 대학 입학 후 태피스트리 기법을 배우며 더 빠져들었고,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태피스트리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교수님들과 선배들로부터 하지 말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 누구도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먹고살기 힘드니 돈이 되는 작업을 하라는 뜻이었지 싶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난 누가 뭐라고 하든 짜고 또 짰다. 태피스트리 작가로 활동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창작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나름의 고민과 시도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소재가 달라지면 그 자체로 고유한 직물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실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평소 쉽게 버리지 못해 모아두었던 것들을 꺼냈다. 포장지, 리본, 줄자, 종이, 잡지, 테이프 등으로 실을 만들었다. 충분히 흥미롭고 괜찮은 시도였으나 썩 만족스러운 실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기를 며칠, 잔뜩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려 집어든 비닐봉지를 보고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실을 만들었다. 정말 마지막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시도는 나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유레카!
2012년 개인전 일정을 정해놓고 전시 준비에 돌입했다. 비닐을 재료로 한 개인전은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60여 평 공간을 채울 직물들. 실을 사서 제작해도 쉽지 않은데 실부터 만들어야 했다. 작업 이전에 비닐봉지 수급도 문제였다. 혼자 모으는 것으로는 수량은 물론 비닐봉지의 색이나 재질에 한계가 있을 게 뻔했다. 지인들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안 쓰는 비닐봉지를 모아줄 것과 꽃그림을 하나씩 그려줄 것을. 해외에 체류 중인 지인들, 잠시 여행을 다녀오며 챙겨다준 지인들, 모두 집에서 모이는 비닐들을 차곡차곡 챙겨 꽃그림과 함께 보내왔다. 아이를 키우는 지인들은 아이의 그림을 보내왔다. 이렇게 모은 비닐은 실이 되고 꽃이 되어 전시 후 비닐과 꽃그림을 보내온 지인들에게 돌아갔다.
작업량이 많아지면 그만큼 자투리도 많아진다. 실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비닐봉지의 손잡이와 끝단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모아놓으니 이 또한 한 보따리다. 버리면 소각장행이고, 태워서 좋을 것 없는 쓰레기. 쓸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모았다. 그러다 접한 쓰레기 섬 이야기. 비닐 자투리 중 흰색만 골라내 무작위로 이어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Plastic Island>(2012)다.

2 <Plastic Island>, plastic bags, sewing, 200×180cm, 2012.
3 비닐로 만든 꽃 <Plastic Flower>.

오롯이 진심을 담은 작품

전시의 반응은 좋았다. 폐비닐봉지의 화려한 변신을 확인했고, 이 놀라운 변화를 더 많이 공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다수 관객은 설명 없이는 비닐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비닐로 만든 실이 자연스러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설명 없이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다가갈 방법이 필요했다. 전시장에 걸어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작품이 일상에서 쓸 수 있는 물건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이 된 비닐이 물건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물건은 작품보다 어려웠다. 보기에도 매력적이어야 하며 내구성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1년 반의 시도 끝에 쓸 만한 가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5년째 다소 느리지만 새로운 아이템들을 하나씩 만들어내고 있다.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전시 공간에서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닐로 실을 만들고 직물을 짰다.
알아볼 수 있도록 비닐의 형태를 살려도 보고, 비닐이 그대로 드러나게도 해보고, 만져볼 수 있도록 하지만 전시장이라는 공간은 마냥 조심스러운 곳인 듯하다. 2015년 해방촌 신흥시장에 위치한 공간에서 전시할 기회가 있었다. 이전과 다른 방식의 전시를 해보고 싶었다. 작업실 일부를 옮겨놓고, 전시 기간에 작업을 했다. 책상, 의자, 재봉틀만 놓고 시작된 전시. 앉아서 실을 만드는 게 다다. 작품도 없고 관객 수도 적었지만, 대화는 어느 때보다 많이 오갔다. 이후, 2016년 공예트렌드페어에서도 4일간 현장에서 작업했고, 2018년 개인전에서도 20여 일간 전시장에서 작업하며 관객들을 만났다.
환경을 생각해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관심을 쏟게 되었고, 보는 이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환경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3년 전에는 나를 업사이클링 작가로 보는 이들에게 극구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자니 다시 물건 만드는 일에 고민이 깊어졌다. ‘이렇게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까지 보태는게 잘하는 짓일까?’ 처음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의 고민이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쉽게 쓰고 버리는 비닐봉지로 만든 물건. 그래서인지 재료를 알면 쉽게 사지 않는 물건이기도 하다. 쉽게 사지 않아도 좋다. 쉽게 사서 쉽게 버리는 물건이기보다, 고민 끝에 사서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되기를 바란다.
비닐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작업을 하며 무분별하게 쓰고 버리는 물건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오늘도 비닐을 만지고 있지만, 내일도 비닐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12년 전 어쩌다 집어든 비닐봉지로 10년을 작업했듯, 또 어쩌다 만나는 다른 재료, 다른 생각, 다른 마음이 있다면 미련 없이 비닐과 뜨거운 안녕을 할 것이다. 무엇으로 어떤 작업을 하든 매번 똑같이 느끼는 것은 작업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작품에 쏟은 감정, 생각, 에너지,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관객 앞에 놓인다. 또 관객들의 촉은 놀랄 만큼 예민하다. 숨길 수 없고 속일 수 없다. 방법은 하나다. 그저 나답게 하는 것. 미련함까지 꼭 안고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조금씩 나아가볼까 한다. 다시 10년 후, 내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글·사진 제공 김태연_섬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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