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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4월호

어두운 현실 속 예술 작품에 말 걸기
재난과 예술 작품

예술 작품은 작가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간 시대 또한 반영한다. 번영과 평화 외에도 그 이면과 어둠까지 담기에 예술은 의미 있다. 재난의 시대에 탄생한 음악에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있을지,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를 살아낸 화가들의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문학과 영화는 재난의 상황을 어떻게 담아내고 상상하는지 차례로 살펴본다.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재난의 시대 속 음악 시대의 묘사부터 위안까지

13세기 이탈리아의 수도사였던 ‘첼라노 사람 토마소(Tommaso da Celano)’는 이후 유럽의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명상시를 적었다. “분노의 날, 그날이 오면 세상 만물이 재로 화하리라. 다윗과 시빌라가 예언했듯이.”
이 시는 전 유럽의 수도사들이 부르는 성가가 됐다. 장송 미사곡 즉 <레퀴엠>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디에스 이레(Dies Irae·분노의 날)’다. 모차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작곡가가 이 시에 선율을 붙였다. 우리나라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위기에 닥칠 때마다 쾅쾅거리는 광포한 합주와 함께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합창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 베르디의 레퀴엠에 나오는 <디에스 이레>다.
이 시는 레퀴엠에 등장하는 다른 성가인 <리베라 메(Libera me·나를 구해주소서)>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는 ‘분노의 날, 재앙(calamitatis)과 고통(miserie)’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인류가 상상해 온 재앙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성경 출애굽기는 ‘피로 변한 강물, 개구리·이·파리·메뚜기의 창궐, 가축과 사람의 전염병, 우박, 세상이 어두워짐, 집집마다 맏아들의 죽음’을 언급한다. 지진, 홍수, 대화재, 폭풍과 회오리바람도 늘 인간을 위협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할까, 예술적 영감을 위해서는 불운한 일일까. 클래식 음악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인류가 대부분의 재앙을 회피한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기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의 수요가 늘었지만, 클래식 팬이 즐겨 듣는 음악은 지금도 대부분 18세기 중반, 비발디·바흐·헨델의 전성기부터 170년 남짓한 시기 동안 나온 음악들로 묶여 있다.

흑사병과 아우구스틴의 노래

북부 독일 출신인 바흐와 헨델이 태어나기 6년 전인 1679년, 신성로마제국의 남동쪽 끝인 빈을 흑사병이 휩쓸었다. 이 도시에서만 7만 6,000명이 죽은 걸로 추산된다.
이 도시에는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길거리 음악가 아우구스틴이 살았다. 하루는 흑사병이 덮친 도시를 아우구스틴이 걷다가 도랑에 빠졌다. 그는 그대로 잠들었다. 날이 새고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시체인 줄 알고 흑사병으로 죽은 시신더미에 던졌다. 눈을 뜬 아우구스틴은 시체더미 속에서 움직일 수 없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모든 것이 끝장났네!/ 돈도, 사랑도, 모두 끝장났네/ 부자 동네 빈에서, 나날이 축제였지/ 이제는 전염병뿐이로구나. 시신들의 축제뿐이지/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 것이 끝장났네!” 사람들은 그를 시체더미 속에서 꺼내주었다.
이 노래의 선율은 윤석중 선생이 가사를 붙인 <동무들아>라는 노래의 가사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죽음의 그림자라고는 없는 이 천진한 멜로디는 100년 뒤 빈에서 베토벤과 나란히 활동한 작곡가 요한 네포무크 후멜이 더없이 화사한 변주곡으로 만들었다. 유튜브에서 ‘Hummel Augustin’으로 검색하면 들어볼 수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묘하게도 한 세기 더 지난 뒤 빈 궁정오페라 감독으로 활동한 작곡가 말러의 교향곡 5번 3악장이 떠오른다. 표현주의적인 절규의 1·2악장과, 사랑 노래에서 자연의 찬미로 이어지는 4·5악장 사이에 낀 아리송한 춤곡 악장이다. 중간부 홀츠클라퍼(나무 딱딱이)의 독특한 음향에서는 마른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차이콥스키와 비창 그리고 콜레라

그러나 ‘재앙’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1893)이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이 초연되고 1주일 남짓 지난 뒤 당시 러시아에 만연했던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혹자는 그가 비소를 마시고 자살한 뒤 비소 중독과 비슷한 콜레라로 위장했다고 분석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1악장. 주요 선율이 등장한 뒤 청천벽력과도 같은 꽝 소리와 함께 모든 악기의 광포한 질주가 시작된다. 흡사 하늘을 검게 가리고 모든 것을 갉아버리는 메뚜기 떼일까. 모든 것을 떠내려 보내는 쓰나미와 같이 금관의 난폭한 포효가 잦아지면 슬프고도 서러운 현악의 주제가 회상된다. 목 놓아 우는 것도 같고, 한 줄기 위안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위안을 찾아보자. 유럽을 뒤흔든 흑사병의 잿더미 위에서 유년기를 보낸 안토니오 비발디의 성가는 어떨까. 작곡가로서 비발디의 존재도 얼마간 사소한 재난 위에 탄생했다. 그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지진이 베니스를 뒤흔들었다. 놀란 어머니는 “이 아이를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아이는 약속대로 사제의 길을 걸었고, 성당에서 고아 음악가들을 가르치는 ‘음악 신부’가 됐다.
음악영화 <샤인>에 삽입된 비발디의 성가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ondo pax sincera)>를 소프라노 에마 커크비의 청아한 목소리로 듣는다.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 없이, 이 세상에 참된 평화란 없구나. 세상은 겉으로는 화려하나 감춰진 상처로 썩어가는구나. 징벌과 고통 가운데도 평안한 영혼은 순결한 사랑을 희구하며 살아가노라.”

글 유윤종_동아일보 기자

에곤 실레의 <가족>. 1918년 작. 오스트리아미술관 소장

지독한 현실을 반영한 미술 스페인독감이 캔버스에 남긴 것

아내와 배 속의 아이, 그리고 에곤 실레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스페인독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젊은 남자가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 앉아 있다. 평소 그림에 좀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단박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남자는 이 그림을 그린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다. 남자 앞쪽에는 역시 벌거벗은 채 웅크려 앉아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인이 있다. 여인의 다리 사이에는 귀여운 얼굴의 아기가 밝은색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앉아 있다.
1915년 에곤 실레는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결혼한다. 에곤 실레는 결혼 후 각종 전시회에서 성공을 거두며,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며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일에서의 성공보다 더 기쁜 소식은 아내 에디트가 임신했다는 사실이다. 실레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조카를 모델 삼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그려 작품 <가족>을 완성한다.
실레의 작품 중에서 온전한 가족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이 그림이 유일하다. 그만큼 실레에게 가족이 주는 의미는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럽에 창궐한 무시무시한 위력의 스페인독감에 아내 에디트가 감염되면서, 실레는 아내와 배 속의 아이까지 함께 잃고 만다. 그리고 아내를 지극히 간호하던 실레 또한 아내가 죽은 지 3일 만에 사망한다. 그가 그린 <가족>의 모습은 끝내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지 못한다.
평소 건강하던 실레와 그의 아내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다른 감기 바이러스가 어린아이나 노약자처럼 면역 체계가 약한 사람에게 주로 전염되는 데 비해, 스페인독감은 특이하게도 20~30대 전반의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가장 맹위를 떨쳤다.
‘스페인독감(Spanish influenza)’은 1918년 3월부터 1920년 6월까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맞물러 대유행한 바이러스 질환이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사람이 1,500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은 2,100만 명에서 5,000만 명, 많게는 1억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약 6억 명의 사람이 스페인독감에 걸렸다. 인류 역사를 뒤흔든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었다.
스페인독감은 인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 ‘무오년 독감’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스페인독감이다. 1918년 조선 사람 742만여 명(당시 조선 총 인구 1,670만여 명)이 스페인독감에 걸렸고, 이 중 14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염병으로 흉흉해진 민심은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을 발발하게 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에드바르 뭉크의 <병든 아이>. 1896년 작.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불행한 가족사와 스페인독감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지를 지킨 뭉크

녹색 정장을 한 노년의 남자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노인은 초췌해 보이고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이 힘들어 보인다. 뭉크의 작품 <스페인독감을 앓은 후의 자화상>. 이 작품은 제목처럼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인 스페인독감에서 회복한 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그린 자신의 모습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에 그는 50대 중반이었지만 병마와 처절한 사투를 벌인 뭉크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대단했는지 자화상으로 남겨두었다. 후에 이 그림은 의사들이 보는 감염학 교과서 표지에 실리기도 했으니 뭉크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꽤 흐뭇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뭉크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고,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과 질병을 표현했다. 노르웨이의 신화와 전설을 보면 유난히 음침하고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피오르(fjord·빙하가 깎아 만든 U자형 골짜기에 바닷물이 유입돼 형성된 좁고 기다란 만)와 빙하에 둘러싸여 있었고, 오로라가 밤도 낮도 아닌 북구의 하늘에 빛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 노르웨이는 그런 곳이다.
뭉크의 할아버지는 고위 성직자였고, 아버지 크리스티앙 뭉크는 군의관이었으며 나중에는 오슬로 근교 빈민가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뭉크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뭉크 역시 어릴 때부터 병약했고 감기를 늘상 달고 살았다. 어머니는 뭉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다섯 살에 당시 만연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종교에 집착하는 증상을 보였다.
그런 집안을 돌본 것은 누나 소피에와 이모였다. 하지만 누나 역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폐결핵으로 뭉크가 열다섯 살이 됐을 때 사망했고, 1895년 남동생 안드레아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한다. 이어 1898년에는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뭉크는 “우리 가족에게는 병과 죽음밖에 없네. 그게 우리 핏속에 있어.”라는 자조적인 말로 푸념했다고 한다.
이런 뭉크의 가족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1896년 작 <병든 아이>다. 아픈 아이와 그를 간병하고 있는 슬픔에 젖은 어머니를 그린 그림이다. 간병하는 어머니가 울고 있는 것인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뭉크 특유의 우울하고 어두운 주제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던 누나 소피에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당시 뭉크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림 속 간병인은 뭉크의 형제들을 돌보던 이모 카렌일 것이다.
뭉크는 이런 불행한 가족사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그림을 그렸다. 평생을 괴롭히던 천식도 이겨냈다. 알코올 중독과 신경 쇠약에 의한 정신분열증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9개월 동안 입원한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1918년에 전 세계를 휩쓸고 숱한 사망자를 냈던 스페인독감까지 병약한 뭉크를 공격했지만 그는 스페인독감도 끝내 이겨냈다. 많은 사람들이 뭉크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울하고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처럼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뭉크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여든 살 넘게 살았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글 박광혁_내과 전문의. 《미술관에 간 의학자》 저자

1 영화 <컨테이젼>의 한 장면
2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사진 제공 더스토리)

소설과 영화가 재난을 다루는 방법 우리가 찾는 것은 희망

지난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을 했다. 코로나19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행하고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유럽과 미국, 남미 등에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국경 봉쇄만이 아니라 도시와 지역 간의 이동을 막고 식당과 극장 등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임시 폐쇄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모든 병원을 임시 국유화한다고 선언했다.
2001년 9·11 테러로 시작된 21세기는 사스, 신종 플루, 메르스, 코로나 등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공포가 핵전쟁이라면 지금 공포의 대상은 바이러스 아닐까. 하나의 세계는커녕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당장의 생존에만 매달리는 아포칼립스의 새벽 같은 느낌이다.
한데 바이러스의 공포로 텅 빈 거리나 마스크를 쓴 수많은 사람이 이룬 풍경은 낯설지 않다. 이미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문화예술에서 예견한 모습이다. 그 작품들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였지만 그들은 과거 혹은 당대를 통해 재난이 닥친 미래를 상상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알베르 카뮈

흑사병의 공포가 유럽을 휩쓸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이 많은 것을 파괴했다. 도시와 자연 그리고 인간성까지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알베르 카뮈는 1947년 소설 《페스트》를 발표했다. 《페스트》는 전쟁 와중에 쓰기 시작했으며 전염병이 휩쓰는 프랑스의 오랑시가 배경이다.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자 오랑시는 봉쇄된다. 그리고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격리된다.
치명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인다. 기자인 랑베르는 참극의 현장과 거리를 둔다. 자신은 오랑시의 일원도 아니고, 당사자가 아니라면서 슬쩍 발을 빼려 한다. 파늘루 신부는 신의 구원에 호소한다. 하지만 신이 전염병을 준 것도 아니고,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결국 병을 막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노력이다. 외부자인 타루는 의사인 리유와 함께 사람들을 조직하고,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 반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작가다. 《페스트》에서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신에 의지하지만, 누군가는 싸운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사람들의 저열한 본성이 나온다. 그러나 카뮈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인간들 속에는 경멸할 것보다 찬탄할 것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까?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을 리얼하게 그린 영화로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2010)이 있다. 홍콩에 출장을 다녀온 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죽는다. 세계 곳곳에서 베스와 동일한 증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컨테이젼>에 나오는 바이러스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작으로 추정되는 것처럼 박쥐가 근원이다. 박쥐의 변을 먹고 자란 돼지를 요리한 셰프가 최초의 바이러스 감염자였다. 그가 접촉했던 것을 만진 사람들이 전염되고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신종 바이러스의 시작은 원숭이·낙타·닭·박쥐 등 동물이 대부분이었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면서 남극이나 히말라야의 얼음 아래 잠자고 있던 고대 바이러스가 깨어날 것이라는 보고도 있었다. <컨테이젼>을 보면 전염병이 퍼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강조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왜 필요한지도. <트래픽> <헤이와이어> 등 사실적인 스타일의 영화를 잘 만들었던 스티븐 소더버그는 <컨테이젼>에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마치 보고서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컨테이젼>이 리얼한 바이러스 보고서라면 <퍼펙트 센스>(2011)는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퍼펙트 센스>에 나오는 바이러스는 인간의 오감을 파괴한다. 후각·미각·청각·시각 순으로 감각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는 감각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요리를 만들어줄지 고민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어떻게 교감하고 하나가 돼야 하는지 고민한다. 오감을 잃어가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점점 좁혀가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의 생각만 옳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최고라고 강변하는 사람들. 지금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의 감각을 풍성하게 하며 다양한 생각을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재난이 닥치면 일상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생존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2006)는 문명이 괴멸한 후 살아남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대재앙이 벌어진 후 세계는 아수라장이 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빈 집과 상점을 뒤지거나 서로 죽이며 물건을 빼앗기도 한다. 원시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대재앙 이후 태어난 아들과 함께 끝없는 여정을 이어간다. 더 나은, 더 좋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암울하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두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미래를 보는 것, 희망을 찾는 것이 결국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글 김봉석_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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