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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4월호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기꺼이 충실하기
소설 《페스트》에서 찾아본 삶의 자세

평범하고 조용한 해안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돌면서 도시가 봉쇄된다. 오랑시의 사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가까워 오는 죽음의 공포에 마주한다. 출간된 지 70년이 지난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내용 중 일부이다. 잔혹한 현실과 죽음 앞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는 《페스트》에서 카뮈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의연히 주어진 운명 앞에 책무를 다하며 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는 벌써 한 달 넘게 깊은 혼란과 우려에 시달리고 있다. 확진자가 두 배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중순부터였다. 급기야 모든 학교의 3월 개학도 2주간 미뤄지게 됐고, 그사이에 다시 4월로 더 미뤄졌다.
이번 칼럼의 주제는 ‘전염병 같은 재난 상황에서 문화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다. 나는 조금 구태의연하지만 상식적인 사항을 두 가지 적으려 한다. 첫째는 냉정하고도 과학적인 현실 대처이고, 둘째는 자기 직분에서의 성실성이다. 이것은 카뮈(A. Camus)의 소설 《페스트》(1947)에서 알려주는 통찰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각 나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당할 정도로 알려지고 또 알게 되는 전지구적 초연결망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 사태는 크게 보면, 오늘날 편재하는 이주 상황이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의 하나다. 이제 어느 대륙 어느 나라에 있어도 우리 각자는 그 나라 그 지역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 밖의 사람들에 노출돼 있고, 이 사람들의 문화와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다. 그러면서 전에 없던 사건 사고도 발생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대처 방안은 전체적으로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부에 안주하기보다는 현실의 미비점들-아직 외국 언론에 지적되지 못했지만 우리 스스로는 잘 의식하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 이를테면 개인 수칙의 준수나 집단적 예배 강행에 일부 나타난 무지하고 무책임한 일-을 하나씩 줄여가야 할 것이다. 개인·사회적 합리성의 수준을 높여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일로 무급휴가에 사직까지 강요받는 일터도 있다지 않은가? 불안에 따른 혐오증이나 적대 의식도 그런 어두운 면모다. 사실 예술이 보여주는 것도 이런 드러나지 않은 현실의 배후다.
전염병 같은 재앙이나 위기는 현실에서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인간은 역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절망적 현실과 싸우는 가운데 상황을 조금씩 타개해 나간다. 그러면서 때로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것이다.

자기 직분의 충실성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의사 리유가 보여주듯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것만이 속수무책의 위기 상황에서 진실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자(聖者)나 승리자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그것이 때로는 패배할지라도, 깊은 공감을 느낀다. 싸우는 인간의 진실한 양심은 남을 만한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재난에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대응에서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 이런저런 노력에도 여전히 미비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외신 보도와 무관하게 우리의 대응에서 부족한 사항을 지속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문화는 훌륭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 병원이 개발한 ‘1인 감염안전진료부스’도 그렇다.
그 출발이 될 만한 가치는 무엇일까? 아마도 투명성일 것이다. 합리성이 사회·정치적 투명성을 지칭한다면, 투명성의 개인적 이름은 정직성이 될 것이다. 사회제도적 합리성과 개인적 정직성이 결합된 사회야말로 좋은 사회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결합은 카뮈가 알려주듯이 무슨 사명감이나 포부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어떤 다른 일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거짓되지 않게 해나가는 데, 아니 해나가려고 애쓰는 데서 이뤄진다. 시끌벅적한 영웅이 아니라 직무에서의 자기성실성을 조용히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이미 영웅적 실천을 하는 것이다.

글 문광훈_충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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