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디자인은 꾸준히 실천하는 삶
윤호섭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명예교수는 국내에 그린디자인의 개념을 널리 알리고 정착시킨 선구자다. 그는 “그린디자인이란 원래 쓸 필요가 없는 말”이라고 단언한다. 환경 문제를 덜 일으키고 에너지를 덜 쓰게 만드는 것이 그린디자인이라면, 모든 디자인이 그런 개념을 내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환경을 생각하는 디자인을 실천해온 윤호섭 교수를 우이동 그린캔버스 작업실에서 만났다.
교육을 통해 전하는 환경 메시지
광고는 끊임없이 욕망하게 만든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하나둘 사들이다 보면 어느새 물건들이 좁은 집을 점령한다. 충분히 쓸 만한 물건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넘쳐나는 물건에 치인 사람들은 더 큰 집을 갈망한다. 소비사회의 악순환이다. 산업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은 윤호섭 교수 역시 이 연쇄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 공식 포스터 디자이너로 참여한 1991년,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한국의 환경 문제에 대해 물은 일본 대학생과의 만남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폭제였다.
“디자인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라는 연쇄작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윤 교수가 환경을 생각하는 디자인을 전파하고자 택한 방법은 ‘교육’과 ‘생활 속 실천’이다. 1994년 국민대 조형대학 학장을 맡은 후, 다음해에 ‘환경과 디자인’을 교양필수 과목으로 개설했다.
환경에 대한 마음이 디자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학생들에게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펜보다 키보드가 익숙한 세대에게 책 내용을 손으로 옮겨 적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냥 읽기만 하면 흘려보냈을 책의 메시지가 몸을 거쳐 머리로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1 우이동 그린캔버스 작업실에 앉아 있는 윤호섭 교수.
2 버려지는 테이프 조각을 모아 만든 ‘테이프 공’.
일상 속의 디자인을 실천하고 탐구하는 <녹색여름>전
그가 지향하는 환경 친화적인 디자인은, 사람들이 막연히 품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좋은 생각’이 자연스레 생활에 스미도록 하는 것이다. 꾸준히 하기가 어려울 뿐, 결심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2003년 국민대 디자인대학원에 그린디자인 전공을 개설한 이래 2008년 시작된 단체전 <녹색여름>은 매년 국내 그린디자인의 색다른 시도를 살필 수 있는 전시다. 집과 작업실 등에서 버려지는 테이프 조각을 모아 2004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테이프 공’은 이 전시의 단골 작품이 됐다. 14년간 수십 개의 작품으로 늘어났는데, 한 사람이 배출하는 쓰레기는 그 양이 적을지라도 오랜 시간 쌓이면 많은 양이 될 수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초기에는 그린디자인 전공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전시를 열었지만, 이제는 윤 교수가 전하는 그린디자인 메시지에 공감하는 일반인도 여럿 동참하고 있다. 주부, 루게릭병을 앓는 시인, 어린이 등 참여 작가의 면면도 다양하다. 윤 교수는 전시가 끝난 후에도 이들의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우이동 작업실 입구에 윈도 갤러리를 마련했다. 전면 유리창을 활용한 미니 전시장인데, 주기적으로 작품을 교체해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전시 중인 작품은 서울숲에서 <녹색여름>전이 열렸을 때 자원봉사자로 처음 인연을 맺은 윤정자 할머니의 작품이다. 1969년 작가의 어머니가 결혼 선물로 만들어준 이불호청을 뜯어 앞치마로 만든 재활용 디자인 작품인데, 윤 교수가 나뭇잎을 그려 넣어 힘을 보탰다. 가슴속에 나무를 심으면 새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녹색의 빛바랜 정도가 조금 다르다. 색이 바래면 윤 교수가 추가로 그려 넣어주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이 앞치마엔 2대에 걸친 모녀의 삶과 늦깎이 작가로 데뷔한 할머니의 마음, 윤 교수가 함께한 세월이 녹아 있다. 윤 교수는 시간의 힘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녹색여름>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3 이면지나 자투리 종이를 활용해 작업하는 윤호섭 교수.
4 작품들 뒤로 태양광 패널이 보인다.
무엇보다 강한 ‘시간의 힘’
윤 교수의 디자인에서 가장 강한 힘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마음에 와닿는 건 시간의 힘이 주는 메시지다. 그건 꾸준한 실천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녹색여름>전 10주년 기념 트로피의 수상자 면면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수상자 중 한 명인 박민정 작가가 7년간 진행해온 ‘배냇저고리 릴레이’는 시간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배냇저고리는 짧은 기간 사용됐다가 버려지기 쉬운 물건이다. 하지만 윤 교수가 잎사귀를 그려 넣은 이 배냇저고리는 7년 동안 10명의 아기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생활 속의 그린디자인은 어떤 모습일지 탐구해온 작가의 진심이 담긴 장기 프로젝트인 셈이다. 이 아기들은 배냇저고리에 그려진 그림처럼 환경을 사랑하는 푸른 싹으로 자라날 것이다.
또 다른 수상자가 사람이 아닌 골판지 방석이라는 사실도 이채롭다. 두꺼운 골판지를 여러 장 끈으로 엮어 만든 이 방석은 근 20년간 의자로, 작품 받침대로, 좌탁으로 변신하며 윤 교수의 전시에 동행해왔다. 한번은 골판지를 묶은 끈이 느슨해져서, 윤 교수가 전시에 온 아이들과 함께 바짝 당겨 묶었다. 한데 버리려던 자투리 끈을 아이들에게 주었더니 그걸 서로 엮어 줄넘기를 하고 있더란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해온 자신조차 쓸모없다 여기고 버린 자투리 끈이, 순수한 아이들과 만나 새로운 쓰임새를 얻은 것이다. 윤 교수는 덕분에 사물의 효용 가치는 어디까지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골판지 방석은 여러모로 10주년 기념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던 셈이다.
2008년 국민대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윤 교수의 일상은 분주하다. 2000년 개설한 홈페이지 그린캔버스(www.greencanvas.com)의 게시판은 여전히 그를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인터뷰와 강연 요청, 공익단체를 위한 로고 디자인 등 문의도 많다. 윤 교수는 사유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평생 살아간 톨스토이가 삶의 멘토라고 했다. “내가 죽으면 무덤에 아무 표시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톨스토이처럼, 사람도 물건도 마지막은 그랬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탄소 발자국 줄이기나 제로 웨이스트 운동처럼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기보다, 작은 일이라도 환경을 위해 꾸준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윤 교수가 평생 추구한 그린디자인의 정신일 것이다.
5 돌고래 제돌이를 생각하며 간직한 인형.
6 매일이 지구의 날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티셔츠에 돌고래, 산양, 웃는 별(지구) 그림을 그린다.
7 작업실 입구에 전시된 앞치마 작품.
- 글 고경원 자유기고가
- 사진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