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테마토크

3월호

아득하게 깊고, 심오하며, 자유로운

검은 상자 극장의 탄생

사람들의 상상과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하루살이 극장’에서 무대와 객석이 일방향으로 고정된 액자형 무대인 프로시니엄으로, 그리고 텅 빈 공간 속 구조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블랙박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검은 상자 극장은 공연의 총체적 경험을 극대화하는 공간이다.

허구적인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공간, 내가 사라질 수도 있는 공간, 상상과 욕망으로 가득한 공간, 그럼에도 현실적인 공간이 바로 극장劇場이다. 또한 극장에서 가장 떨리고 설레는 순간은 공연이 시작되기 바로 전 혹은 공연 중 막의 전환을 알려주는 시점으로, 일명 암전暗轉이라 부르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모든 빛은 완전히 사라진다. 우리의 의식은 빛이 사라진 검은[玄] 공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랙박스 극장의 시작을 역사적 시간에서 찾는다면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삶의 가치관에 대한 재검토를 고민하던 다다이즘에 연결된다.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모두 여기에 연결된 현상이다. 사회 개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는 예술·문화로 이어지면서 다소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성격을 띤다. 여기서 ‘급진’의 라틴어 어원은 뿌리radix를 지칭하며, 결국 모든 영역에서 규범이나 관습적 현상과의 단절이 다시금 기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연장도 혼돈과 매너리즘을 벗어나 다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래전 유럽의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공연장들은 우월적 범람과 사치적 자만함으로 팽배했다. 그런 가운데 아방가르드 개념의 극장은 시대를 다시 본질적인 실험 속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자유로운 접근과 실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편 블랙박스 극장의 실질적인 출발은 리허설 무대를 그대로 연장한 것이기도 했다. 공연장 건축의 발달 유형에서 이런 근원을 찾는다면, 혁신적 블랙박스 극장에 개념적 영향을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어두웠던 중세 시대의 상황으로부터 비롯한다.
서양에서 극장의 역사는 로마 멸망 이후 약 1천 년의 기나긴 시간 동안 단절된다. 대륙과 영국에서 모두 그러했다. 겨우 1580년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물리적 공연장(테아트로 올림피코Teatro Olimpico)이 처음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중세라는 긴긴 시간 동안 삶과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공연물 없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세가 아무리 폐쇄적이고 종교적인 영향력아래 있어도 시민의 상상과 욕망을 다스리게 해줄, 즉 공연장에 준하는 무엇인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패전트pageant 혹은 만시옹mansion 등 이름으로 이동 가능한 ‘수레극장’이 바로 그 욕구를 채워준 하나의 장치였다. 이 유형의 극장은 일상의 거리에서 혹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서 실행된 지금의 버스킹busking 문화에 연결된다. 이 극장의 이름은 일시적인 공연을 위해 잠시 존재했다 사라지는 다양한 장치물을 총칭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두고 ‘하루살이 극장teatro effimero’이라고도 표현한다.
블랙박스 극장의 시작은 역사의 이 부분에서 많은 영감을 발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양차 대전을 거쳐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연과 극장의 본질을 두고 밀도 높은 논쟁과 실험이 이어졌다. 극의 내용 전달을 중요시하는 예술가들에게 도구와 형식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됐고, 오히려 탈피해야 하는 걸림돌이었다. 블랙박스 극장의 출발은 공연장에서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공연자들은 외형이 아닌 의미 전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300~400명 정도를 수용하는 극장이기에 무대와 객석 등 세트 구조가 유연해졌고, 불필요한 요소들은 단순해지거나 작아졌으며, 소요 비용은 더 저렴해 비영리이거나 예산을 절감하려는 예술가와 기획사에 큰 매력이 된다.
새로운 극장 유형의 탄생과 함께 공연물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을 만들어주는 극장의 매력은 바로 그 시간, 그곳이라는 현재성이다. 이는 극장이라는 공간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에게 돌아온다. 블랙박스는 공연장의 역사에서 가장 큰 자유로움을 허락했다.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 다시 가능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21세기 들어 다양해진 공연물은 이제 극장 전통의 강자였던 프로시니엄 무대만으로 그 전체를 담아낼 수 없게 됐고, 또한 다양한 연출과 새로운 경험을 포기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무대와 객석이라는 물리적 제한을 벗어나 동시대의 가치를 구현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지향하는 블랙박스 극장이 유지해야 할 물리적 조건으로 폭과 길이를 통한 다양한 평면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충분한 층고(실의 높이)를 확보하는 것이다. 즉, 연출을 지원하는 기계 및 설비 장치의 여유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볼륨(체적)이야말로 경험의 효과와 가치를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고유하게 지닌 ‘공간감’의 감각을 통한 공간 체험에 대한 원초적인 회복을 의미한다. 배우들의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움직임과 몸동작, 그리고 수직적인 풍경과 공간의 성능을 위한 깊이와 수평 역학 등은 모두 정제된 3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자box는 인간에게 원형原型적인 건축 공간이고, 검은색black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검은색 상자는 관객이 배우에게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가장 좋은 조건이다. 블랙박스 극장의 어둠은 단순한 검은색인 흑이 아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의 한 글자인 검을 현에 더 가까우며, 밤하늘처럼 어두우면서도, 아득하게 깊고, 심오하고 또 고요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블랙박스 극장만이 갖는 자유롭고도 우아한 매력이다.

임종엽_인하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