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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2월호

예술 현장과 소통을 이뤄냈는가 동료평가제도 시시비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현장 예술인을 지원하면서 도입한 경쟁자 상호 평가 방식의 ‘동료평가제’가 인권침해 시비에 휩싸였다. 이 제도에 반대하는 예술인 375명이 지난 8월 폐지 촉구 성명을 낸 데 이어 여성 혐오와 차별, 모욕 등 인권침해를 낳는다며 10월 1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동료평가제 논란의 뿌리를 찾다 보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닿게 된다. 블랙리스트 파장으로 2015년 중단된 다원예술지원사업을 6년 만인 2021년 재개한 것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제도개선 이행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의 제도개선 기조는 다음과 같다. ‘블랙리스트가 재발하지 않도록 수직적 관료 시스템의 폐해와 퇴행적인 협치 구조의 문제를 개선하고 공정·개방성·투명성에 입각해 예술 현장과 소통하고 협력해 민주적이고 평등한 결정 구조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동료평가제는 이 연장선에서 추진됐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제도개선책 가운데 하나가 동료평가제였던 셈이다.
각종 토론회에서도 제도개선의 핵심 축으로 ‘심사의 투명성과 현장 목소리 반영’이 제시됐다. 지난 3월 16일 예술위가 주최한 ‘다원예술 지원사업 복원’ 토론회에선 현장과 접속 수준을 높이는 것 자체가 투명성을 증진하는 방향이란 의견이 많았다. 예술위가 2020년 12월 16~18일 마련한 현장 대토론회에서도 ‘현장 이해도가 있는 기획자나 예술가, 관객 그룹에 의한 다면평가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술위는 지난 4월 23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동료 그룹 심의’란 이름으로 동료평가제를 공표했다. ‘예술 현장의 참여를 통해 동시대 다원예술의 정책적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담론을 공론화한다’는 게 동료평가제 도입의 취지였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예술위 안팎에서 제도개선 필요성에 공감 분위기가 많았고, 투명성과 현장이란 화두도 빗나간 과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도의 세부를 설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세심한 검토와 충분한 준비 필요

현장에서 흘러나온 동료평가제의 문제점은 크게 여섯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혐오와 차별, 모욕 등이 담긴 익명의 심사평을 평가 당사자에게 여과 없이 원문 그대로 통보했다. 가장 큰 폐해로 지적됐다. 둘째, 응모자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평가를 거부하면 무조건 지원에서 탈락하는 구조였으니 소규모 지원이라도 절실한 이들로선 평가 방법에 토를 달기가 어려웠다. 셋째, 40여 건의 지원서를 닷새 안에 평가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면서 심사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지급하지 않았다. 사실상 ‘착취’라고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넷째, 심사 기준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술돼 있고, 그나마 ‘다양성’ ‘실험성’ 등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의 나열이었다. 평가 기준이 흐릿하니 평가자의 주관이나 취향, 정치 성향에 따라 심사가 이뤄지는 폐단을 낳았다. 다섯째, 평가자의 책임성을 담보할 장치가 없었다. 현장 사람들에게 동시대 예술의 방향이나 창작 생태계의 발전 등을 염두에 두고 종합적이고 책임감 있게 심사해 달라는 건 과한 기대다. 여섯 째, 동료평가제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면서 고민이 부족했다. 경쟁자끼리의 평가가 자칫 잘못하면 ‘상호 깎아내리기’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더구나 서로 교류나 접촉이 없고, 가치와 철학의 공유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면 세부 내용에 대해 세심하게 검토하고 충분하게 준비해야 한다. 평가에 참여한 이들 중에 “심사위원 일손 덜어주는 무보수 아르바이트 같았다”는 느낌을 토로한 이도 있다. 소액이라도 일정한 심사비를 제공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동료평가제를 유독 저예산·젊은·신예 따위의 수식어가 붙은 공모에 국한해서도 곤란하다. 심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여유도 제공하는 게 좋겠다. 가능하다면 심사의 전문성을 갖추고 사명감을 높일 수 있도록 적절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평가의 기준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거다. 예술위 혁신 태스크포스에서 활동한 김미도 서울과기대 교수의 제안처럼 1차 심사가 아니라 최종 심의 과정에서 지원자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개 발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성과 투명성 강화

국외 동료평가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영국예술위원회의 심사 기준 8개 항목엔 ‘지원자의 작업이 동료 평가 결과를 반영하는가?’가 포함돼 있다. 500여 개의 기금을 운영하는 캐나다 매니토바주 예술위원회는 기금 지원 심사에서 ‘동료 예술인 평가제Peer assessment’를 도입했다. 하지만 전반적 추세는 ‘책임성과 투명성 강화’다. 예술지원기관이 심의 주도권을 행사해 책임 있게 지원하되 각종 제도를 마련해 투명성을 확대하는 방향이다. 영국에선 심의 과정에 외부 전문가를 자문 위원으로 위촉하지만 기본적으로 결정권은 예술위원회의 위원회와 사무국에 있다. 미국·영국·일본은 구체적이고 자세한 지원 심의 기준과 절차를 마련해 두고 있다. 지원에 대한 최종 결정도 지원심의위원회가 아닌 예술지원기관 차원에서 책임성 있게 내린다. 한국문화 예술위원회는 심의 결과에 대한 책임과 판단을 대부분 심의 위원 개개인에게 부여한다.
투명성 없는 책임성은 독단과 권한 남용으로 이어지기 쉽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그 비극적 결과 아니었던가. 책임성이 부족한 투명성도 문제는 많다. 이번에 논란을 빚은 동료평가제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임석규 《한겨레》 기자 | 자료 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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