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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7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32 내 몸을 부끄러워한 죄

사라진것을 기념하는 철길

이제 거의 끝날 때가 된 이 연재를 마치기 전에 짚고 싶은 장소와 사람이 있다. 마포와 한의사 명호다. 일단 떠오른 생각을 바탕으로 초고를 만들어놓고 명호가 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안녕, 나의 자궁》.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초고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서 명호가 분명하게 말한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호를 알고 지낸 뒤, 그가 보여준 태도, 특히 불행한 여성에 대한 연민은 거의 투사적이었다. 불운이 겹쳐, 죽을 듯이 혹은 비틀비틀 살아내던 나의 어느 한 시절에 명호는 비빌 언덕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명호는 펄쩍 뛸 게 분명하다. 그건 언니의 착각이라고!
서울 사는 동안 살아본 곳은 서너 곳. 기억에 남도록 가본 곳은 열 곳도 안 될 것 같다. 결국 활기차게 살아보지 못한 거다. 이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마포는 오래도록 더듬고 추억할 곳이다. 우선 마포 구역 몇 곳에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이 있었다.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작가회의 회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마포경찰서 유치장에 며칠 있어본 것도 그 덕이었다.
나의 불안과 우울을 나보다 먼저 알아본 한의사 명호. 병원 건너편 어느 오피스텔에서 동업자 몇을 불러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해준 것도 아름다운 추억. 작가회의 이사장을 할 때, 사무국 직원 모두를 초청해서 푸짐한 식사를 대접해 낯을 세워줬다.
이 여자. 마포 토박이다. 지금 마포역에서 내려 호텔 쪽으로 나와 걸어가다 보면 명호가 일하는 빌딩이 나온다. 병원 뒤로는 정겨운 음식점과 노래방과 은근슬쩍 숙박업소도 끼어 있다. 그곳이 도화동. 복사꽃 마을이다. 명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엄마와 삼촌들, 형제자매가 모두 마포초등학교 동창생. 그가 어릴 땐 산 중턱의 학교를 올라가다 보면 형무소 죄수들이 무와 배추 농사를 짓던 밭이 내려다보이던 곳이지만 지금은 온통 아파트 세상.
일제강점기부터 그곳 마포시장에서 외할아버지 형제가 고무신 가게와 건어물 장사를 했다. 형님은 건어물 장사로 큰돈을 벌었지만 외할아버지는 시장에 불이 나서 가게를 다 태운 뒤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명호가 어릴 때 교복 입은 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니던 마포종점의 해장국집은 아직도 그대로 영업 중. 용산성당 뒤쪽엔 외국인 선교사 무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은 벌벌 떨면서 담력내기 놀이를 했다. 지금은 대기업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공덕동 사거리엔 개봉관을 거쳐 밀려 내려온 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명호는 중학생 때부터 학생 입장 절대 불가 영화를 섭렵했다고 으스댄다. 동업자 선배와 후배들이 함께 몰려가서 밤새 노래를 부르던 굴다리 밑의 ‘방석집’. 이곳에서 일하던 여성 중엔 명호의 환자도 있다. 돼지껍데기집에 대한 그리움엔 왠지 선량함과 순정도 담긴 것 같다.
해마다 홍수가 지면 아현동과 만리동 고개에서 물이 쏟아져 한옥 댓돌을 넘은 물이 방의 이불과 머리를 적셔 놀라 깨기도 했다는 명호. 한의사가 돼 여성의 아픈 몸을 돌보며 깨달은 것들이 있다. 그 깨달음을 모아 만든 책이 10여 년 전에 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자궁》. 이미 중국 일본 대만 태국 등지에 판권이 팔렸고, 국내에선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정작 본인은 맘에 안 들었단다. 그래서 다시 썼다. 맘에 안 든 원인 중 하나가 ‘분노의 글쓰기’였다고. 마치 나를 두고 한 말 같아서 뜨끔했다.
책을 거의 품에 안는 기분으로 앉아서도 누워서도 읽었다.
그리고 물었다. 나의 자궁은 안녕, 한 적이 있던가?
결국 나는 똑바로 누워 내 자궁의 안녕을 되짚게 됐다. 자궁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몸을 가진 나, 여성의 몸으로 살아낸 내 삶에 대해 되짚는 동안 통렬한 진통이 왔다. 울음이 몸 안에서 울컥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웃이 못 듣도록 이불 뒤집어쓰고 울어야 했다. 남자와 다른 몸을 가졌다는 걸 안 뒤부터 임신이 불가능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쌓이기만 한 통곡.
기다렸다. 고요하게. 숨을 깊이 쉬면서. 하지만 울음은 기포처럼 꺼졌다. 구원은 쉬 오지 않았다. 무엇때문일까….
내 몸엔 남루한 세월이 켜켜이 굳었고 벗겨내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가? 이미 지난 일. 누구의 잘못인가? 오래지 않아 답을 얻었다. 내 몸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경멸했다는 것.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몸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몸과 마음의 불균형이 극단으로 벌어지고 뒤틀어진 채 살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죄와 함께.
명호의 《안녕, 나의 자궁》이 더 늦지 않게, 그러니까 죽기 전에 몸에게 용서를 빌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한다. 왜 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지, 이런 감정을 갖게 됐는지는 사람마다 공감의 밀도가 다르겠지만 여성들과 공유하고 싶다.

글·사진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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