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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10월호

끌어당기다
문학을 소리 내 읽는 시간이 선사하는 정화의 경험

한 공간에 모여 시와 소설을 소리 내 읽으면, 언어뿐만 아니라 공간의 떨림도 함께 느껴져 그것마저 문학의 일부가 된다. 책장에 꽂힌 시집을 꺼내 한 구절을 소리 내 읽어보면 내 목소리로 듣는 시는 눈으로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읽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크고 작은 감정적 물결을 일으키며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낯선 경험.
낭독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엔 항상 뭔가를 쓰고 싶다는 오은 시인. 누군가와 만나고 대화하는 일이 극도로 조심스러워진 시절, 예술이 주는 이런 경험은 한 소설의 제목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었다.

위트 앤 시니컬에서 열린 시 낭독회에 참여한 이들

한 달에 한 차례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청취자의 사연이 도착했다. “코로나19 시기의 힘듦을 시를 읽으며 이겨내고 있어요. 우울감이 밀려올 때 시집을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크게 낭독을 하면, 이상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연을 읽고 진행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 “여행 안 좋아하는 사람조차 몸이 근질거리는 게 요즘이잖아요. 집에 온종일 혼자 있다 보면 말 한 마디 안 할 때도 있고요. 말은 제때 나오지 않고 감정은 억눌릴 수밖에 없지요. 아마 그분은 누군가와, 혹은 스스로와 대화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방송이 끝난 후 버스를 타러 가는 내내 그분 생각이 났다.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책장 에서 시집을 꺼내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시집이었을까. 어떤 시였을까. 어떤 구절이 그를 움직였을까. 낭독할 때의 목소리는 집 안에서 어떻게 울려 퍼졌을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나는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은 시집을 넉넉히 사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벼리어진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부드러워질 것이다.
위트 앤 시니컬에서는 정기적으로 시 낭독회가 열린다. 나는 현장에서 시인들이 시를 읽는 것을 가만히 앉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낭독이 끝나면 “딱 저 시인이 쓴 시 같다!”나 “아, 저렇게 읽으니까 말맛이 사는구나!” 같은 탄복이 으레 뒤따라왔다. 그리고 모든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이 읽어야 가장 좋다는 확신이 생겼다. 목소리의 힘은 위대한 것이었다.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상상할 때,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귀로 듣고 온몸의 숨구멍이 열릴 때,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저 이곳에만 머물고 싶었다.

‘듣는 시’가 갖는 힘

낭독회의 낭독자로 참여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나는 독자로서 낭독회에 참석할 때를 더욱 좋아한다. 시를 듣는다는 것은 묵독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온몸이 진동하고 온 마음이 동하는 순간도 종종 찾아왔다. 어느 날의 시는 노래 같았고 어느 날의 시는 수수께끼 같았다. 들으면서 떠올리고 읽으면서 떠올린 것을 붙잡아두는 순간이 반복되었다. 낭독회가 끝나면 나도 모르게 기진맥진해졌는데, 아마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낭독한 사람이 꼭 너 같다?” 어느 날엔 누군가가 웃으며 내게 물었는데, 별도리 없이 희미하게 웃고만 있었다. 정말로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낭독회에 다녀온 날이면 늘 뭔가를 쓰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시간의 밀도가 아주 높았던 그때를 어떻게든 남겨두고 싶었다. 시도, 소설도, 희곡도 현장에서는 다른 차원의 어떤 것으로 내게 깃들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좋았다’고 말하지 않고, 무엇이 어떻게 왜 좋았는지 스스로에게 집요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것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처럼 글씨는 늘 삐뚤빼뚤했다.

시를 발음하는 순간 시작되는 새로운 우주

권여선 소설가가 《문학과사회》에 발표한 단편 <손톱>을 완독하던 날이 떠오른다. 나는 사전에 그 소설을 읽지 않은 채 참석했다. 아무 정보 없이 소설을 듣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었다. 권여선 소설가와 독자가 번갈아 낭독하는 형식이었는데, 소설의 말미에서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희인데, 소희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자발적인 것이기도 했다. 맘껏 울고 싶은 찰나, 누군가가 비수 같은 말을 내게 던진 것처럼 말이다. “소희는 강변을 달리는 통근버스 차창에 바짝 붙어 앉아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본다. 버스가 좋은데, 소희는 버스가 슬프다. 그러니까 슬픈 건 버스가 아니라 햇빛인데,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알지 못한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슬프면서 좋은 시간이었다.
하재연 시인의 낭독회에 다녀온 날,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여운이 길다. 집에 돌아와 《우주적인 안녕》(문학과지성사, 2019)을 다시 읽었다. 읽은 것을 다시 읽는다는 것, 한번 들어온 것을 좀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는 것, 개중 어떤 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고 낯설기까지 하다는 것. 재독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다. 우주를 기어이 만드는 이와 그것을 기꺼이 만나는 이.” 그런 날에는 시의 행간이 단순한 여백이 아니었다. 행성과 행성 사이는 멀지만, 그 안이 보이지 않는 입자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청취자 분의 사연처럼 ‘이상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나도 이미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파스칼 키냐르가 쓴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들린 것을 다시 발음하면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거기에 나 자신이 앉아 있을지도 모르고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되었든 발음하는 이를 그쪽으로 힘껏 끌어당기고 있을 것이다. 약간 기우뚱한 쪽으로, 보통은 서늘하고 때로는 뜨거운 곳으로. 그때마다 나는 잠시 내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때만큼은 내가 다름 아닌 나인 것만 같다. 슬픈 것도 나, 좋은 것도 나, 슬프면서 좋은 것도 나, 슬퍼서 좋은 것도 나다. 나는 나를 한껏 끌어당긴다.
글 오은_시인
사진 제공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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