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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6월호

기억하려는 서울, 잊으려는 서울
직접 가본 서울 시내 다크투어 장소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부터 미아리고개까지, 또 어떤 날은 남산 예장동 자락과 남영동, 서대문독립공원을 걸어봤다. 이전과는 결코 똑같아 보일 수 없는 서울. 서울은 아직도 ‘기억하려는 자들’과 ‘잊으려는 자들’ 사이 어디쯤 있는 듯했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 산등성이가 하얗게 벗겨져 마치 백마가 누운 형상이 됐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이름 붙여졌다.

용산을 중심으로 한 다크투어 서울에서 70년 전 그날을 목격하다

높게 솟은 탑과 비장한 표정의 군인 동상, 유엔 참전용사기념비, 펄럭이는 국기들…. 서울 한복판에 ‘전쟁’을 주제로 하는 기념관이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전쟁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터벅터벅 전시실 본관을 향해 가다 보면,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 ‘평화광장’을 지나가게 된다.
어머님!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라고 했다. ‘어느 학도병의 편지’란 이름으로 전시실 한쪽 벽면에 새겨진 그 글은, 어떤 무기나 탱크보다도 더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군복 대신 교복을 입은 앳된 그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달려 나가, 부지기수로 죽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 어렵다.
전쟁기념관을 나와 남영역 쪽으로 걷다 보면 파란 간판에 ‘USO’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용산 미군 기지 메인포스트 맞은편에 위치한 17번 게이트, 캠프 킴(Camp Kim) 부지 내에 노르스름한 색의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미군에게 복지오락 서비스를 제공했던 미군부대 내 공간, USO(미군위문협회) 건물이다.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비어버린 이 공간은 2008년 ‘용산공원갤러리’라는 이름의 용산공원 시민소통 공간이 됐다. 114년간 국민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용산기지 건물이 지난 2018년 민간에게도 개방된 것이다.
혜화동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서울대병원 후문을 들어서면,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라는 이름의 위령탑이 있다. 하얀색의 탑에 금색으로 ‘현충탑’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나무와 잔디밭으로 조그마한 정원같이 꾸며진 이곳 안내판엔, 1950년 6월 28일 이곳에 북한군이 병원에 난입해 입원한 국군 부상 장병들을 밖으로 끌어내 잔혹하게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한 환자 등 900여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라”라는 말이 당부 같다.*
미아리고개 정상에 위치한 미아리예술극장(구 아리랑아트홀) 뒤편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설치돼 있고, ‘미아리 눈물고개’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적혀 있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자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남한의 주요 인사들을 북으로 끌고갈 때 거쳐간 길목이었다고 한다. 북한군에 납치당해 생이별하는 이들의 고통을 ‘단장(창자가 끊어지는)’에 빗댔다. 지금, 이곳을 쌩쌩 지나는 차들이 야속할 정도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서울은 전쟁을 목격한 채 아직도 신음하고 있었다.

*서울대병원 외에도, 당시 고양군 홍제리(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29여단 캠프 근처에서 일어났던 학살 사건 또한 6·25전쟁 중 일어났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전쟁기념관
  • 주소 용산구 이태원로 29
  • 전화번호 02-709-3081
  • 누리집 www.warmemo.or.kr

남영동과 남산 다크투어 검은 건물이 숨기고 있던 역사의 민낯

5층 조사실의 복도. 좌우 양쪽으로 16개의 조사실이 배치돼 있다.

나는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씩씩하게도 들어섰다. 그야말로 “남영동 무서운줄 모르고.”(영화 <1987> 중)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위치한 한 카페에 점심시간을 맞은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회색 담벼락 넘어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듣고 나온 나는 그 이질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한동안 멍했다.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2022년 정식 개관 예정)의 해설사는 서울에는 ‘보안분실’(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보안수사대가 사용한 별관)이라고 불리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했다. 군사정권 시설, ‘대공분실’로 불리기도 한 보안분실은 홍제동·옥인동·서빙고 등지에 있었다. 해설을 하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중심으로 한 영화 <1987>의 장면들을 때때로 인용하기도 했다.
익히 알고 있었듯, 검은색에 가까운 벽돌 건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은 고문이 자행된 조사실이 있는 5층이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은 이곳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고 그 이전에 정치인 김근태(1947~2011)는 이곳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이나 이근안에게 고문을 받았다. 5층의 창문 모양은 겉으로 봐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폭은 좁고 위아래로 길었다. 혹시라도 투신할 것을 대비해 머리 하나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만들었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는 모르도록 작게 설계했다고 했다. 1층에는 테니스장이 있었다. 그 테니스장에서는 수사관들이 테니스를 치며 체력 단련을 했다.
층수 표시가 아예 없는 엘리베이터, 1층부터 5층까지 뱅글뱅글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 똑같이 생긴 철문들이 주욱 늘어선 감옥과도 같은 복도, 앞에 누가 있는지 모르게 지그재그로 배치됐고, 층수를 알지 못하게 1·2·3의 숫자로만 구별해 놓은 조사실, 밖에서만 조절할 수 있게 해놓은 전기 장치, 밖에서만 열 수 있게 해놓은 문, 밖에서만 안을 볼 수 있게 한 작은 구멍, 자해하지 못하게 철망을 쳐놓은 형광등…‘가해자 중심’ ‘반인권’의 극치였다.
충무로역 5번 출구로 나와 걷다 보면 보도블록에 노란색 나비 모양의 스티커가 드문드문 붙어 있다. ‘기억의 터’로 가는 길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고,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조성한 공간인데, 또 다른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옛 통감부 터로,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또한 이 길은 옛 중앙정보부 본부 건물이던 ‘서울유스호스텔’로 가는 길이다.

1976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이 1983년 7층으로 증축한 형태로 남아 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멀끔하게 생긴 서울유스호스텔은 1973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으나 투신자살한 것으로 조작된 곳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민청학련·인혁당 등 각종 사건의 당사자들이 고문을 받던 곳이라는 사실에 공포감을 느낀 것도 잠깐, 너무나도 멀끔한 그 건물은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건물 입구에는 ‘옛 중앙정보부 본관’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사실 그 안내판이 아니고서는 서울유스호스텔에서는 옛날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는 서울종합방재센터는 중앙정보부 제6별관이었던 곳. ‘지하벙커’ ‘지하고문실’로 불리면서 많은 언론인이 끌려와 취조를 받았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현재는 공연을 위한 넓은 연습 공간으로 사용되는 ‘남산창작센터’는 당시 요원들의 체육관이었다고.
남산창작센터 앞 굴길을 하나 통과하면 서울특별시청 남산별관 쪽으로 나갈 수 있다. 이 굴길의 이름은 ‘소릿길’이다. 소릿길에 대한 짧은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을 읽고는 굴길 입구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눌러봤다. 기분 나쁜 소리가 지지직 들려온 후 타자기 소리,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굴길을 거의 빠져나올 무렵 눈앞에 회색 건물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서울특별시청 남산별관,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이다.
이 소릿길를 통과해 끌려오던 많은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가, 간첩 혐의를 받던 이들이 느꼈을 공포감이 남산별관을 보자 내게도 섬뜩하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 회색 건물에 이상한 위압감을 느끼며 건물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남산1호터널로 많은 차가 지나고, 서울시내의 주요 은행, 대기업, 특급호텔이 보인다. 남산둘레길로 이어지는 뒤쪽 길에는 낮시간인데도 많은 시민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둘레길을 조금 걷다가, ‘기억의 터’ 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올라가는 길은 꽤나 멀게 느껴졌는데, 잘 조성된 나무 계단으로 내려오는 길은 괜스레 짧게 느껴졌다. 고통의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는데, 망각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민주인권기념관(임시 운영 중, 2022년 정식 개관 예정)
  • 주소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
  • 전화번호 02-6918-0102~6
  • 누리집 www.dhrm.or.kr
글 전은정_객원 기자
사진 공간느루

서대문독립공원 다크투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모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서대문독립공원’은 가히 근현대사의 산 교육장이라 할만하다. 비극의 흉터와 함께 과거의 역사를 교훈 삼아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할 수 있는 ‘독립문’ ‘서재필 선생 동상’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같은 건축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크투어는 ‘잔혹한 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힐링과 휴식을 추구하는 일반 여행과 달리 반성과 교훈의 시간을 갖는 게 이 여행의 목적이다. 국립국어원이 다크투어를 ‘역사교훈여행’으로 우리말 다듬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서대문독립공원을 가던 날은 억수가 쏟아졌다. 독립문역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안에서 짓궂은 날씨를 원망했지만, 한편으론 왠지 오늘 같은 날이 다크투어하기 좋은 날이란 생각도 했다. 처음에는 영상과 사진 자료를 통해 얻는 정보가 직접 가서 얻는 정보와 다를 바 없으니 방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게 부담으로 다가와 나가 보기로 했다. 덕분에 공간의 전모를 몸으로도 느껴볼 수 있었다.
장대비를 뚫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도착했을 땐 몸의 반절이 비에 젖은 상태였다. 우산이 짐처럼 느껴졌고 빗물에 신발이 젖어 양말에 물기가 스며드니 찝찝함은 배가됐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임시 휴관 중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됨에 따라 5월 12일 개관 예정이었지만 다시 연기된 것이다. 시기상조라 판단한 모양이다. 100여 년 전에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했던 곳이 지금은 들어가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공간이 됐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살아 있다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찝찝함이 배가된 건 젖은 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선 기획전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 중 후손을 찾지 못한 독립운동가 27명을 소개하는 <잊혀진 독립영웅의 후손을 찾습니다>와 총 16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형무소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는 상설전시로 진행되니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 관람은 잠정 휴관이 끝나야 가능하다.

독립문

추모의 공간

서대문독립공원에는 역사의 아픔과 상흔을 간직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외에도 항일투사와 애국지사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건축물들이 있다. 공원 초입에 우뚝 서 있는 ‘독립문’은 1896년에 세워진 석조문으로 프랑스 개선문을 닮아 있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 외교의 표상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다. 현판석 앞과 뒤에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여 있고 그 위에는 태극기가 조각돼 있다. 독립문 건립은 대한제국 당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확고한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서재필 선생 동상’도 있다. 하늘 높이 쳐든 손끝에는 그가 창간한 《독립신문》이 들려 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독립문 건립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이 밖에도 나라를 위해 희생한 항일투사들과 애국지사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새겨진 ‘3·1독립선언기념탑’이 있으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옛 모화관 건물을 개축해 독립협회회관으로 사용한 ‘독립관’이 있다. 현재는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한 추모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항일투사와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마음속에 아로새기니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느낀 찝찝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아픔이 얼마나 될지 헤아려본 적은 없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물론 기억해야 할 것이 많다고 기억된 것들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아픈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다크투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5월은 비가 많이 왔다. 6월도 5월 못지않게 비 소식이 잦을 것 같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주소 서대문구 통일로 251
  • 전화번호 02-360-8590
  • 누리집 sphh.sscmc.or.kr
글 전주호_서울문화재단 홍보IT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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