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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역사에서 누락된 것을 표현하기
예술과 기록에 대해

최근 예술과 역사의 관계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예술은 시대를 기록해 후대에 전하기도 하고, 지난 역사의 과오를 바로잡는 역할도 한다. 또 기록된 역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재현 불가능한 것을 현실보다 더 풍부하게 재현할 수도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과 역사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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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초상>과 그림 배경에 등장하는 문구.
(출처 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jan-van-eyck-the-arnolfini-portrait)

예술은 단순한 시간의 기록이 아니다

런던에 있는 영국국립미술관에 가면, <아르놀피니의 초상>이라는 그림이 있다. 지금 이 그림의 제목은 <초상>이지만 필자가 맨 처음이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제목이 <아르놀피니의 결혼>이었다. 1434년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한 논란이 많다. 플랑드르 브루제에 살던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한동안 우세했지만, 1997년 아르놀피니가 실제로 1434년에 결혼하지 않았고, 반 에이크가 죽은지 6년이나 지나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제목이 바뀐 것은 이런 연유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흥미를 끄는 지점은 배경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라고 쓰여 있는데, 옮기면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등장인물 둘은 함께 있지 않았다. 오른쪽에 있는 여성은 미래의 부인인 셈이다. 그렇다면 반 에이크가 그림에 새겨놓은 '증언'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화가는 두 모델의 결혼을 본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다.
본 것이 아닌 들은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눈 앞에 있는 현실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예술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술은 단순한 시간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예술은 시간의 가능성을 '듣고' 말하는 쪽에 가깝다. 이런 까닭에 예술의 증언은 반드시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현실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전망일 수 있다.

역사, 영원한 예술의 원천

예술에 내재한 이런 속성에 주목한 인물 중 한 명이 안토니오 그람시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알려진 그람시는 토리노대학 재학 시절 중세미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자 그의 상상력은 그림으로 뻗어갔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이야기한 그림은 <이피게니아의 희생>이다. 원작은 BC 4세기 희랍 화가인 티만테스의 것이지만, 그람시가 말하는 작품은 폼페이의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가멤논 왕과 그의 딸 이피게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아내 헬레나를 파리스에게 빼앗긴 아가멤논 왕은 머뭇거리는 그리스 동맹국들을 설득해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
그러나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사 출병하지 못한다. 온갖 역병과 불행, 그리고 무풍 현상이 지속된 것이다. 아가멤논이 왜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샀는지 이설들이 많은데, 트로이 전쟁에서 죽어갈 그리스 청년들을 염려해서 그랬다는 판본도 있고,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여신 못지않게 자신의 사냥 실력이 좋다는 것을 뽐내어서 그랬다는 판본도 있다. 여하튼 판본은 달라도 결론은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삼아 마침내 그리스 군대가 트로이로 출병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피게니아의 희생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이다.
그람시가 언급한 그림에서 아가멤논은 두건을 쓴 채 눈을 가리고 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지 않는 아가멤논의 얼굴이 그람시의 눈길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는 흥미롭게도 레싱의 예를 들면서 베일의 효과를 언급한다. 그람시가 레싱을 거론한 이유는 1912년에 토리노대학에서 들었던 토에스카 교수의 수업을 상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람시의 기억에 따르면 토에스카 교수는 당시 메데이아의 눈을 가린 베일에 대한 레싱의 해석을 소개하면서 "이 베일은 무능의 예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표정으로 일그러진 부성의 비탄을 결정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평했다. 이런 해석에 힘입어 그람시는 예술에서 '표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킨다. 그람시에게 이 베일은 '예술적 장치'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아가멤논의 얼굴을 가린 것은 비탄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극적으로 그 느낌을 증폭하려는 의도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람시가 말하는 베일은 반 에이크가 새겨놓은 '증언'을 다시 읽어보게 한다. 재현 불가능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베일이라는 예술장치가 필요하다는 그람시의 말은 반 에이크가 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증언'을 남겼는지 짐작하게 한다.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그림이라는 것은 베일과 같은 예술적 장치 자체인 것이다.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그림은 현실보다 부족한 보충물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부한 실재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토대를 닦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예술과 역사의 관계를 다시 돌아볼 계기이다. 역사는 끊임없는 예술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예술은 기록되어 있는 역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람시가 말하는 것처럼, 예술은 현실에서 누락되어 있기에 그 현실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실재의 효과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글 이택광_문화비평가. 경희대 교수.
지은 책으로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빨간 잉크>,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마녀 프레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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