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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4월호

음악인 정태춘실천적 예술가의 길을 걷다
포크 음악의 기수, 저항운동의 상징, 노래 속에 창조해낸 시적 세계. 이 같은 설명만으로 누구나 떠올릴 법한 아티스트가 있다. 밥 딜런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포크 음악의 대표 뮤지션. 그렇다면 설명은 그대로 놓고 국적을 한국으로 바꿔보자. 아마도 우린 한 아티스트를 명징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정태춘이다.
그가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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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0주년에 전하는 감사의 인사

문학평론가 오민석은 계간 <시작> 2019년 봄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밥 딜런은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세계 최강의 베스트셀러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돈 덩어리'로 만든 시스템에 저항하는 주체이다. 정태춘은 1978년 첫 번째 앨범 <시인의 마을>의 성공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자신을 스타로 만든 시스템과 불화하고 있는 주체이다. 공허한 사랑 노래로 인식되던 대중문화는 삶의 노래로, 얇고 얕은 감성으로 치부되었던 대중문화는 사회·정치적 성찰의 심도를 갖기 시작했다."
삶과 음악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의 지평과 행동반경을 한 차원 높게 확장시킨 정태춘. 그리고 그의 이름 옆엔 박은옥이 있다. 부부이자 음악적 동료인 뮤지션 '정태춘·박은옥'이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올 초 '정태춘·박은옥 데뷔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들의 4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다며 동료, 선후배 144명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4월 중 기념앨범 발매를 시작으로 전국 순회공연, 전시회, 시집 및 가사집 출간, 헌정공연 등이 차례로 예정돼 있다.
지난 3월 중순, 서울 연남동에 자리 잡은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009년 데뷔 30주년을 맞았을 때 그를 인터뷰하고 꼭 10년 만이었다. 당시 5년 넘게 노래 만들기를 접고 있던 그는 "신자유주의, 산업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야만성에 동의할 수 없어 새로운 문명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것이 세상에 불복종하는 나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몇 년 뒤인 2012년, 새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만드셨지요.

"박은옥 씨가 '나를 위해서는 곡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미안한 마음에 그때 곡을 썼지요. 그런데 막상 내놓고 보니 오히려 저에게 맞는 곡이 더 많다고 하더군요. 박은옥 씨를 위해 만든 노래들인데 이상하게도 제가 더 많이 부르는 앨범이 됐어요."

이번 기념앨범을 위해서 새로 곡을 쓰셨습니다. 앞으로도 다시 쓰실 계획 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음악이 내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그런데 40주년을 준비하면서 가족을 위한 노래가 한 곡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앨범에 실리는 <연남, 봄날>이 그 노래예요. 제가 방이동에서 30년 넘게 살다가 지난해 초 연남동으로 이사 왔거든요. 그동안 힘든 일도 좀 있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했으면 하는 생각에 만들었습니다."

기념앨범은 가수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딸 정새난슬의 제안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나이 든 현재의 목소리로 젊은 시절의 노래를 부르자는 것이다. <빈 산>, <고향>, <나그네> 등 기존 곡들과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에 실렸던 <사람들>을 현재에 맞게 개사한 <사람들 2019> 등이 수록된다. 여기에다 <연남, 봄날>, 그리고 예전에 만들었으나 발표하지 않았던 <외연도>를 더했다. 딸과 함께 노래한 곡도 있다.

처음엔 (40주년 기념사업을) 만류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부분에 설득되셨나요.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다시 시장으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서고 만나는 이런 생활을 내 삶에서 또 할 수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나를, 내가 해왔던 것을 열어 보임으로써 누군가에겐 감사 인사를 전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러 과찬을 받더라도 '허허' 하고 웃을 수 있는 정도의 나이도 된 것 같고요."

막상 준비를 시작해보니 어떠신가요.

"제가 너무 나대는 것 같아요. (웃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요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도 너무 많고 언론 인터뷰 요청도 계속되는데 사양하지 못하고 있어요. 15년 넘게 활동도 없었고 시장에서 떠나 있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뭔가를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거죠. 자가당착에 빠진 것도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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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공연 모습.

3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문화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에서 공연하는 정태춘.

4 정태춘의 붓글 작품.

세상으로 눈을 돌리다

1978년 <시인의 마을>을 발표한 정태춘은 MBC, TBC 등에서 신인 가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음반사에서 만난 박은옥은 이듬해 그의 곡으로 <회상>을 발표했고 두 사람은 1980년 결혼했다. 1984년 발표한 4집 <떠나가는 배>부터는 정태춘·박은옥 두 사람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놓기 시작했다. 5집 <북한강에서>(1985)까지 잇따라 히트하면서 상업적 성취도 얻었지만 이들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대신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사회를 향한 적극적인 시선과 고민을 담은 결과물이 1988년 내놓은 6집 <무진 새 노래>다. 1990년 발표한 7집 <아, 대한민국>부터는 투쟁적 메시지가 더욱 선명해졌다.
초기의 목가적이고 서정적이던 이들의 노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 됐다. 그의 말마따나 개인의 일기가 사회의 일기로 변모했다. 화려한 가수의 삶 대신 실천적 예술가의 고된 삶 속으로 발을 디딘 것이다.
40주년 기념 프로젝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태춘·박은옥의 지난 시절을 반추한다. 지난 40년 노래 인생에서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변곡점은 무엇이었을까.
"노동자들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1988년 청계피복노조가 열었던 전태일 기념 일일찻집 행사에 참가했어요. 당시는 노조와 관련된 모든 것이 불법이던 시절이었어요."
이후 그는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문화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이어갔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한 싸움에 투신하는 등 시대와의 '불화'에 기꺼이 나섰다. 바윗돌에 계란을 던지는 듯한 싸움이 이어졌지만 빛나는 전과도 올렸다. 바로 음반 사전심의 철폐다.
그가 1990년 발표한 <아, 대한민국>은 사전심의를 무시하고 내놓은, 말하자면 '불법' 음반이었다. 수십 년간 이어져온, 정부가 대중음악을 사전 검열하던 제도에 대한 저항이자 선전포고였다. 누구도 선뜻 동참하지 않던 상황에서 그는 이 싸움에 오롯이 혼자 나섰다. 불가능해 보였던 도전은 6년 만에 그의 승리로 귀결됐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음반 사전심의제도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는 대중음악 표현의 자유를 얻어낸 상징적 사건으로 문화사에 기록된다.

지난 10여 년간 음악 대신 주로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셨나요.

"가죽공예도 했고 사진도 찍었어요. 제가 손으로 뭔가 만들고 만지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 건 붓글입니다."

예전에 사진전을 여신 적도 있습니다.

"음악 대신 사진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어 3, 4년간 매달렸어요. 제가 했던 노래와 비슷한 스타일의 사진이 나오더군요. 후미진 곳, 모순과 갈등의 상황, 이동과 변화의 뉘앙스를 담은 그런 장면들을 계속 잡게 됐지요. 현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제 기조가 사진으로 이어진 셈이지요. 그런데 하다 보니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건 한계가 느껴졌어요. 노랫말처럼 자유롭지 않아서 다시 텍스트로 돌아간 거예요."

붓글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원래는 박은옥 씨가 천자문을 공부한다며 교재를 준비했는데 어쩌다 보니 제가 그걸 잡고 하게 됐어요. 처음엔 펜글씨로 시작했어요. 하루에 서너 시간씩 썼는데 무리를 했는지 손에 문제가 생겼지요. 펜을 잡을 수 없을 만큼이요. 그러다 우연히 붓을 잡게 됐는데 훨씬 글쓰기가 수월하더라고요."

붓글로 쓰시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처음엔 천자문을 썼어요. 500자까지 쓰다 보니 어느 날 한시가 나오더라고요. 한시를 공부하면서 쓰는 게 재미있어졌지요. 그런데 한시란 건 서로 주고받으며 나눠야 제 맛 아닙니까. 주거니 받거니 할 사람이 없으니 소통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한글로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한글로 텍스트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어요. 캘리그래피니, 서예니 하고 말하는데 이도 저도 아녜요. 전문가들이 보면 그저 '막글'이지요."

시장 밖의 예술을 고민하다

40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되는 전시회에는 그가 작업한 붓글도 소개된다. 인터뷰 도중 작품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사무실 한편에서 한 뭉치의 붓글 작품을 가져왔다. 그의 노래와 가사를 담은 것부터 개인적인 소회, 통렬한 각성을 촉구하며 강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은 <반산(反産·반 산업주의)> 시리즈, 그리고 손녀가 그리다 만 그림 위에 한시를 얹은 것까지 다양했다. 한시를 풀이해주고 해당 구절을 쓰게 된 배경을 꼼꼼하게 설명해주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로봇 장난감을 조립하는 소년처럼 반짝거렸다.
<반산> 시리즈 중 긁다 만 복권이 붙어 있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을 사본 적이 있는지 묻자 그는 "그럼요, 팔자 한 번 고쳐보자 싶어 사봤죠"라며 웃었다. 그는 '막글'이라고 했지만 펼쳐놓은 작품들은 독창적 매력과 조형적 아름다움이 썩 잘 어우러져 있었다.

따로 배우지는 않으셨나요.

"혼자서 계속 썼어요. 써보고 또 써보고.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막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말을 벼리는 동시에 이를 종이 위에 조형미 있게 구현해야 하니까요.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이번 전시회에 내놓을 작품은 지난해 여름에 집중적으로 많이 썼어요."

음악 대신 이젠 붓글을 소통의 언어로 삼으신 건가요.

"그렇지요. 언젠가부터 노래 대신 붓글을 내 언어로 삼을 수 있겠다 싶더군요. 이전엔 노래를 통해 개인적인 감상부터 혁명적 상상력까지 표현했다면 이젠 붓글을 통해 내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 점이 지금껏 붓글을 쓸 수 있도록 만든 동력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회는 새로운 도구로 세상에 말을 거는 첫 시도인 셈인데요.

"그래서 이게 제일 궁금해요. 처음으로 제 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바라볼지 말이죠. 제겐 무척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사람들이 과연 함께 재미있어할지 모르겠어요."

혹, 글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연히 팔아야죠. (웃음) 제가 다른 분들과 함께 40주년 기념 프로젝트에 동참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곤혹스럽기도 해요. 시장 밖에 있겠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시장에 들어와서 뭔가를 팔고 있는 거잖아요."

반산업주의. 시장 밖의 세상. 이는 그가 오랫동안 품어온 화두다. 그는 "내 번민의 파도는 산업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온다"고 말한다. "지금은 모든 것이 시장에 의해 좌우되고 있어요. 그게 산업주의지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보면 사람을 대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시장에 있어요. 시장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이윤을 내지 못하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이지요. 그런 방식은 교육 현장이든 어디서든 통용되고 있어요. 시장논리로 미래에 대한 허황된 낙관론을 주입하지요. 전 이런 방식에 동의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산업 문명이 어떻게 이정도까지 왔을까, 비윤리적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이다지도 강고하게 자리 잡았을까 싶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장 밖의 예술이 가능할까요.

"그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금 모인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시장 메커니즘을 통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 시장 밖에서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전개해보자고 말이죠.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 문화예술인들도 의미 있는 상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지요."

실천하는 예술인으로 살아오셨는데, 이번에도 직접 깃발을 드시는 건가요.

"주변에선 등을 떠밀기도 하는데 제가 그렇게 앞장설 나이는 아니잖아요. 새로운 상상력과 추진력은 젊은 사람들에게서 더 잘 나올 테고, 그들이 앞장서 이끌어가야겠지요. 대신 저는 옆에서 제가 가진 것을 다 보여주고 소통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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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경은_경향신문 기자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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