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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2월호

민중미술가 임옥상 30년 만에 부활하는 민중미술
선두에 다시 서다
“나이도 먹었는데 여전히 그 모양이냐…. 그런 소리 들어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참을 수 없었어요.” 지난 1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합의 및 무차별 소환장 발부 규탄 기자회견’ 때 주목받은 건 시위보다 ‘그림’이었다.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안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담은 형상물이었다. 이 그림 때문에 행사는 더 뜨거워졌다. 특정국 대사관 100m 안에서 그 나라를 비하하는 퍼포먼스를 금지한다는 경찰의 입장에 따라 ‘아베 총리 얼굴’ 진입이 막혔다. 이에 항의하는 주최 측과 경찰의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이 형상물은 언론 매체의 이슈가 됐다. 이날 자리에는 이 형상물을 만든 작가도 있었다. 그는 왜 이 작품을 들고 나왔는지 마이크를 들고 작품 설명을 했다. 설치미술가 임옥상(66)이다. 환갑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왕성한 활동으로 ‘임옥상은 임옥상이다’를 보여주는 그를 만났다.

민중미술가 임옥상 사진

세상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발아시키는 작가

하늘을 담는 그릇 │ 1350×1350×650cm │ 상암월드컵경기장 │ 2009.하늘을 담는 그릇 │ 1350×1350×650cm │ 상암월드컵경기장 │ 2009.

‘왜 아직도 (피켓 들고)현장에 나가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어지간하면 안 하려고 그랬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번이 두 번째 나선 거다. 소고기 파동때 세게 한 번 한 이후 ‘안티적’으로는 나서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모두가 제물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한?일 정부의 합의는 협상이 아니라, 가려운 데를 긁어준 거다. 나는 아베가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겠다는 미명하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그 당시를 꿈꾸고 있다고 본다. 미국과의 협약을 맺은 건, 그건 정말 고약한 거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보다 더 센 거다.”
목소리 톤도 높아졌다. “어떻게 대명천지에 오바마가 아베를 데려다가 의회 연설을 시키고, 미군이 인정하는 서로 이견이 없는 지역에는 일본이 상륙할 수 있다는 협약을 우리 앞에서 맺었는데 눈뜨고 가만히 있겠는가. 정치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난 그때부터 문재인 대표 등 야당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당시 총선 정국이었다. 선거 쟁점은커녕, 이완구만 물러가라 하다가 게임에서 깨졌다. 그렇게 의제도 못 만들고 세계 정치를 모르는데 무슨 정치를 하느냐이거지.”
‘아베 총리’ 형상은 이틀만에 그려서 만들어 나갔다고 했다. 다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들이 쏟아졌다.
“봐라. 예견된 길을 밟아가고 있지 않나. 결국은 미국이 일본을 통해 동북아를 관리하는 게 편하니까, 일본을 내세워서 한반도와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건데. 즉 한반도는 전선이고, 일본으로 움직이는 건데 두 나라가 과거사 문제 때문에 시끄러우니까. 미국이 압력을 넣어서 사인하게 만들었고, 일본은 신났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모두가 바보다.”
이쯤 되면 ‘좌파 골수’ 같은 분위기다. 천지가 한 바퀴 돌정도로 나이를 먹었지만, 그는 “의식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 100세 시대여서 아직 젊은 걸까, 아니면 뼛속까지 의식적인 걸까, 의문이 생길 때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진짜 어른’처럼 말했다.
“사람이 자기의 기운과 자기의 정신만 가지고 작업을 하고 살면, 그만의 에너지가 고갈된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고, 그들의 아픔과 기쁨 이런 것들이 나를 통해서 발아하는 것이다. 주위에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 한, 나를 통해서 발아하기 때문에 나도 결코 에너지가 줄어들 수 없다. 나 혼자서 잘 먹고 잘살겠다는 사람은, 딱 고만한 그릇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끝나겠지만, 나는 이렇게 넓은데 어떻게 끝나겠는가. 내 의식이 이렇게 흐르는 걸 어떻게 하나”.

일어서는 땅 │ 트랙터 │ 340×340cm │ 1995.일어서는 땅 │ 트랙터 │ 340×340cm │ 1995.

민주화 이후 ‘민중미술’ 작가로서의 고민 그리고 현실

그는 ‘민중미술의 대부’로 불린다. 임옥상의 친구인 시인 김정환은 “임옥상은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사회활동이 매우 왕성한 화가”라고 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4차원’이라는 소리를 듣는 화가 대부분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정권의 탄압에 맞섰다. 1980년 서울대 출신 미술가들이 주축이된 ‘현실과 발언’ 창립 멤버로 민중미술의 태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1970년대에 대학을 마친 임옥상은 ‘현실주의 경향’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현실을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그의 붓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의 폭압 정권으로 이어지던 암흑기였다. 1980년대 ‘광주사태’를 표현한 <땅Ⅳ> <웅덩이II> <나무Ⅲ>를 통해 공유할 수 없는 사회적 격동을 활화산처럼 담아냈다.
‘민중미술’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 진압과 그 반작용으로 제5공화국에 대한 저항이 사회운동으로 확산되던 무렵에 등장한 미술이다. 이는 국내 미술사의 독특하고 상징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미술 시장에 ‘단색화’ 일색이듯, 1980년대는 민중미술이 장악했다. 신학철, 민정기, 임옥상, 오윤 등의 ‘현실과 발언’ 활동 이후,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됐고, 서울 인사동에는 민중미술 전용 전시장인 ‘그림마당 민’이 등장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노동자 농민 등의 시위 현장에는 예외 없이 걸개그림이 걸렸고, 민중미술은 대중을 모으는 선동의 주체가 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가 이어지면서 ‘민중미술’은 서서히 사라졌다. 탄압이 적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심지어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은 제도권으로부터 당당한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에선 ‘민중미술 장례식’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민중미술이 시대 흐름을 타지 못하고, 사회변혁 운동의 정치 노선에 예속되어 예술적 특수성을 잃게 되었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민중미술 작가들이 세월 속으로 묻히고 있을 때였다. 다시 ‘임옥상’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그가 ‘변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민중미술가에서 대중예술가로 변신해, ‘민중에 기대어’ 산다는 것이다. 부당한 권력과 제도에 맞서 작품 활동을 해온 그답지 않은 행보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부르주아 작가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도 들린다.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민중의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 물음과 비판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대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에겐 ‘그림으로 먹고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변했다’는 소리를 들은 건 1992년부터다. 국내 굴지의 화랑인 가나화랑과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다. 전주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온 후였다. “그때부터 그 얘기가 나왔죠. 민중작가가 어떻게 상업작가가 될 수 있느냐”고. 그는 헛갈렸다. “대학교수 하면서 민중미술을 하면 괜찮고, 상업화랑에서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도 ‘그건 아니다’라고 하는 건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작가로서 그림만 그려서 사는 길은 힘들었어요. 직업을 가져야 했지요. 흔한 게 교사?교수?강사 자리였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거잖아요.”
그러면 대형 화랑과 손잡으면서 살 만해졌을까. 그는 “좋아진 건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딜레마에 빠졌다. 그 당시 사회에서 민중미술을 공식적으로 수용할 만한 분위기가 돼서 가나화랑 전속이 됐는데, 전시는 자꾸 미뤄졌다. 전속이 된 2년 후 1994년에 개인전을 열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일어서는 땅’ 시리즈를 새로 발표했는데, 컬렉터들은 작품을 사지 않았다. 1980년대 그린 유화에 관심을 가진 컬렉터가 대거몰렸지만, 그 그림과 다른 신작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사장이 “컬렉터들이 망설이다가 두고 보자며 갔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딜레마가 시작됐다.
“전속 작가로서 지원을 받는 화랑에 제 역할을 못하는 꼴이라니….” 매월받는 600만 원은 큰 부담으로 작용됐다. 1997년 다시 전시했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함과 자괴감’이 들었다. 딜레마 속에서 “빨리 화랑으로부터 독립해야겠다”는 목적이 생겼다. “더군다나 내가 내 그림을 그리려고 한 건데, 사는 사람들이 안 산다고, 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는 “대학 교수로 있을 때는 월급을 쪼개 쓰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니까 그런 딜레마는 없었는데, 전속이된 후 부담감에 내몰리니까 편치 않았다”고 토로했다. 운이 좋은 남자다.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화랑의 전속 작가가 전면 다 해약되는 바람에, 어렵게 말하지 않고도 전속 작가에서 자유롭게 됐다.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 선보인 임옥상 작가의 설치작품 <세월> (책 <어떤 예술의 생애-화가 임옥상을 위하여>(김정환) 중에서).전남 영암 구림마을에 선보인 임옥상 작가의 설치작품 <세월> (책 >어떤 예술의 생애-화가 임옥상을 위하여>(김정환) 중에서).

민중미술에서 공공미술로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이 열린다. 전속의 부담도 없어지고 IMF 외환위기로 길바닥에 나앉게 된 시기에 생태적 지위가 생겨났다. “그때 컴퓨터 화면에 ‘공격적 경영’과 ‘꿈꾸는 자만이 행복하다’라는 말을 띄워놓고 살았다.”
그는 “당시 자기 경영을 잘한 것 같다”고 자화자찬했다. “너무 어렵지만, 이 어려운 때에 내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과연 사람들은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그동안 사람들과 진지하게 직접 만나서 확인한 게 없었다는 걸 알았다. 인사동 ‘차 없는 거리’에 나갔다. 처음에는 IMF 외환위기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임옥상의 당신도 예술가. 모든 사람이 다 예술가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람들과 같이 국경일 등 기록할 만한 날들을 생각하며 시사·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올려 ‘참여형 공공작업’을 시작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자, 미술을 갖고 놀자고 시작했는데 재미있었다. ‘아, 이것이야말로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임옥상이 ‘공공미술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다.
이후 자신의 내부 세계를 완벽히 통찰했다. ‘민중미술가’ 임옥상은 정치?사회문제에 민감했다. 서해 연평도 폭격사건에도, 동강댐 사건 때도, 부시가 MD 미사일 방어망을 한국에도 구축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어김없이 작품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미술계에서 ‘생쇼를 한다’고 손가락질했다.
“별짓을 다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한 선배한테는 ‘너 돌았구나’라는 소리도 들었지요.”
문제는 돈이었다. 지자체나 기업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공미술 활동을 이어가면서 명분이 생겼다. “일단 선후배 주위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했다”. 반응이 왔다. “이건 정말 좋은 일”이라며 도움을 줬고, 연명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1년 남짓 하다보니까 공공미술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내가 봉사를 한다고 시작했는데, 배우는 과정, 공공미술의 학습 시기였던 거죠.”
이후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와 손잡고 ‘도시갤러리 재생사업’에 뛰어들면서 공공미술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수많은 공공미술 설치작품 중에서 그는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 선보인 <세월>(2000)과 서울 상암동에 세운 <희망 전망대> <전태일 다리> 등을 가장 보람찬 작품으로 꼽았다.
영암 구림마을에 설치한 <세월>은 그가 공공미술의 의미를 깨치게 한 작품이다. 그는 “제 나름 성공적으로 표현한작품이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흙+돌+감나무’로 이뤄진 작품은 지름 6m, 높이 1.8m 크기로 달팽이관처럼 휘감기는 모양이다. 주민·작가·행정가 등이 함께 모여, 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이 작품을 통해, 임옥상은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특별한 어떤 것을 만들 수 있을 때에 공공미술이 성공한다”는 결론을 낸 작품으로 자평한다.
하지만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책에 담긴 <세월> 작품을 보여주며, “구암마을에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없어졌다”면서, “연락도 없이 뚝딱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행정의 현주소”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상암동 <희망 전망대>는 ‘하늘을 담는 그릇’으로 유명하다. 해발 98m의 하늘공원 정상에 설치된 희망전망대는 직경13.5m, 높이 4.6m로 그릇 모양의 철골 구조물로 3단의 전망데크가 있다. 15년간 쓰레기 매립장이던 난지도가 ‘생명의 땅’으로 복원된 곳이다. 보기만 하는 조형물이 아니라, 전망대에 올라 서울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람도 조형물도 모두 풍경이 되는 작품이다.
‘전태일 거리’는 전태일 열사 분신 장소인 평화시장 입구 앞 청계천 옛 ‘버들다리’에 전태일 기념 동상이 생기면서 조성됐다. 임옥상이 제작한 동상 주위에는 건립 성금을 낸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 400여 장이 깔려 있다. 임옥상은 “전태일 거리는 이명박 시장을 설득해서 성공적으로 조성할 수 있었다”며 특히 “독지가나 지자체의 돈이 아니라,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만들어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전태일 거리는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보전되고 있다.

사람과 당면한 현실과 함께하는 예술

전태일 흉상 │ 145×72×212cm │ 2005.전태일 흉상 │ 145×72×212cm │ 2005.

결국 임옥상이 꿈꾸는 건, ‘사람과 함께하는 예술’이다. 여전히 민중·대중의 곁을 지키는 그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작품으로 진화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현실을 너무 직시해서 무섭도록 아픈 그림이 임옥상의 트레이드마크다. 대학원시절 추상적인 작품은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그때 논문을 쓰려고 새로운 실험에 몰두했는데,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도 결국 ‘국적도 개성도 없는 남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 역사와 현실을 그려야 하며, 우리의 전통과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부자 화가’라는 이미지를 더 각인시킨 거주지를 벗어났다. 일명 ‘평창동 시대’를 마감했다. 지난해 6월, 경기 고양 삼송테크노밸리에 새 둥지를 튼 그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고 했다. 부인의 ‘승인’으로 분양받은 60여 평의 스튜디오는 완전한 ‘임옥상 미술연구소’다. 진지하던 얼굴에 주름진 웃음이 빛났다. 단호하고 절제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현상을 표현하는 그는 배우 같았다. 대학 시절 연극에 심취했었다는 그는 2년 전에는 영화 <터치>에서 신부 역으로 출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복층 구조의 스튜디오 공간에는 그의 DNA가 녹아든 작품들이 탄생을 앞두고 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은 보는 사람을 뜨끔하게 한다. 벌써 잊고 지나친 지난해 11월 경찰의 ‘물대포’ 사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목탄으로 스케치하듯 장면 장면을 떠낸 작품들은 노동자 편에 섰던 ‘목판화가’ 케테 콜비치의 작품처럼 강렬하다.
그 시대에 생존하려면 누구나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녀야 한다. 변해야 산다. 불황의 바퀴에 올라탄 임옥상은 현실에 직면했다. 화가로서 끝없는 혁명을 시도했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환상에 구멍을 뚫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는 “그림도 빼앗기고 박해받았다. 민중미술을 우리가 언제 먼저 나서서 인정해라 한 것도 없다”면서 “이제 우리나라 리얼리즘 미술로 재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세계에 알려 재평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화가로서 “사회 인식이 없다면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사회의 약한 고리, 부정적인 것을 개선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사회문제를 담은 작품을 통해 대중과의 호흡이 필요하다”고 예술가들을 자극한다. “돈과 권력을 따르면 그에 먹히게 된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이덴티티(identity)와 독립심이다. 사회의 긴장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미술은 장식품이다.”
“민중미술 작가라는 말에 합당한지 스스로 부끄러운 게 많습니다. 부담이 많이 되는 호칭이지요. 말 그대로 민중을 대변하고, 그런 세계관에 나름대로 투철한지 늘 회의하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올해는 민중미술이 부활할 조짐이다. 단색화 이후 한국미술을 대표할 장르로 ‘민중미술’을 선정하고, 화랑과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 계획이다. 가나아트센터에서 <리얼리즘의 복권>전에 이어, 4월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 민중미술 상설 전시관이 개설된다. 30년 만에 부활하는 민중미술 선두에 임옥상이 서 있다.문화+서울

글 박현주
뉴시스 미술전문기자
사진 김창제
작품사진 임옥상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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