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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김아영의 현재 진행형 미래

김아영 작가의 작업실은 종로구 소재 오래된 빌딩에 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나는 준비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선 축하 인사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Prix Ars Electronica 수상작이 온라인으로 발표된 날이기 때문이다. 김아영은 ‘뉴 애니메이션 아트New Animation Art’ 섹션에서 대상인 골든 니카상Golden Nica을 받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조금 을씨년스러운 복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빌딩의 이상한 내부가 그의 최근작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에 등장하는 서울 풍경의 조각들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시사와 미시사, 사변과 픽션을 직조하며

2022년 갤러리현대에서 연 개인전 《문법과 마법》에 소개된 작품과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질문에 앞서 첫 전시작 <이페메랄 이페메라>2007-10로 돌아가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2007년 두 번째 학사 졸업을 준비할 때를 돌아보면 꽤 깊은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내 인생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빠져 있었죠. 디자이너로 잘 활동하다가 좀 늦은 나이에 작업한다고 알 수 없는 미래에 투신했으니, 불안정한 상태였죠. 당시엔 지하철역에서 무가 종이신문을 나눠줬거든요. 그걸 매일 들고 집에 들어오는데, 내 정서에 상응하는 기사 내용이 전부 재난이나 비극에 관한 이슈였어요. 허망하고, 그런데 다음 날이 되면 잊히고… 그런 덧없음을 많이 느꼈죠. 그때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렸어요. 하루하루 목적과 의미가 없더라도 그 의미 없음 자체를 응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 것 같아요. 정직하게 피사체를 촬영하고 결과물을 내는 스트레이트 사진이 재미는 있었지만, 결과물로서 온전하게 프린팅을 마친 상태에 대한 아쉬움과 더는 손댈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콜라주 작업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여러 현장에서 촬영한 동네, 건물, 환경 이미지를 프린팅하고 오려 세워 종이 무대장치를 만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의 포토그래메트리 스캔photogrammetry scan 방식이나 사물의 표면만 따내는 매핑 방식과 아주 흡사한 것 같아요. 제가 포토그래메트리 방식을 좋아하거든요.”
<이페메랄 이페메라>에서 신문에 보도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거리만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무심한 풍경이죠. 그 안에 사람이 어떻게 되든 굳건한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는 느낌이랄까요.” 어쩌면 작가는 미시적 사건을 거시적 관점 안에 녹여내는 방식을 선호하거나 사건 발생을 포함한 거시적 환경에 본능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일 수도 있겠다. 대중에게 소개된 그의 첫 전시로부터 <딜리버리 댄서의 구>까지 작업 여정에서 일관된 것과 변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우선은 제가 관심을 두는 소재가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이상한 사건들, 경계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나 무언가를 가로지르는 현상들에 항상 눈길이 가요. <PH 익스프레스>2011에선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중요한 키워드였고,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2013은 기차가 가로지르며 이념을 실어 나르는 내용이었고요. 거대 서사를 좋아하다 보니 이런 초기 작업에서 모더니티를 둘러싼 여러 가지 거시사와 미시사를 직조하는 작업을 했다면, 2017년부터는 사변적 픽션이라는 방법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됐어요. 제가 액티비스트는 아니지만, 미적 자율성보다는 사회정치적인 메시지에 조금 더 관심이 기우는 편이에요. 저는 완벽히 추상적인 작업은 못 할 것 같아요.”
작가가 말하는 사변적 픽션을 Sci- Fi, 판타지, 마술적 사실주의를 포함한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나 Sci-Fi 영화의 범주에서 생산되는 허구적 세계를 겨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완벽히 추상적 작업은 못 할 것 같다”는 김아영의 말이 이해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 2022, 단채널 영상, 약 24분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2019,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2020, <수리솔: POVCR>2021, <딜리버리 댄서의 구> 등에 이르는 작품은 모두 가능한 다른 세계들로 무한히 갈라지는 시간의 분기점을 내포한다. 1947년 미국의 Sci-Fi 소설가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이 판타지와 차별되는 과학소설의 논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변소설’이라는 용어를 쓴 것처럼, 작가가 구현하는 세계는 시공간을 무대로 활용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시공간의 물리적 차원에 관한 작가의 사색을 반영하고 있다
“<모든 북극성>2010의 경우 여성 기수 이야기에 굉장히 동요하고, 그것을 작품에 투사했던 것 같아요.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을 작업하며 이주자들에게 관심과 존경심을 갖게 됐고요. <딜리버리 댄서의 구>를 작업할 때는 여성 딜리버리 라이더인 친구를 많이 따라다녔어요.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딜리버리에 동행도 해 보고, 인터뷰도 여러 차례 했어요. 저는 타인의 삶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시간에 쫓겨 완성해야 했던 VR 작품 <수리솔: POVCR> 작업 과정에서 겪은 답답함 때문인지 김아영은 실사와 CG를 결합하는 <딜리버리 댄서의 구> 작업 과정을 오히려 즐길 수 있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가상세계인 ‘사이 공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댄스마스터가 최단 거리를 만들기 위해 너무나 영험해진 나머지 시공간을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발생해서 다른 가능세계의 포털 같은 구멍이 생겨요. 그러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이야기예요. 숨어 있는 가능세계 중 하나인 거죠, 후속작에서는 서울을 가능세계의 하나로 설정해 수많은 다른 우주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밑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에서 김아영은 많은 과학 전공자에게 자문받았고, Sci-Fi 소설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천체물리학·위상수학 연구자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시간의 역사, 엔트로피, 고전물리학 등에 대해 배웠어요. 특히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언급되기도 한 ‘페르마의 원리’가 정말 아름답고 흥미롭더라고요. 작업 초창기부터 미로를 만들고 싶었어요. 개념적인 미로 혹은 몽타주로서의 미로일 수도 있고, 시공간이 혼합되고 분기하는 내비게이션 장치일 수도 있는데, 이걸 오브젝트로 구현하고 싶었죠. 위상수학 전문가가 ‘알렉산더의 뿔 달린 구Alexander horned sphere’라는 개념을 알려줬는데, 간단히 말하면 미치광이 같은 백 타임back time, 영원히 끝나지 않는 두 갈래 길 같은 거예요. 3D 조형물로 만든 건 본 적 없다고 하셨는데, 그걸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알렉산더의 뿔 달린 구’가 라이더들이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루트를 상징한다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끝이 트여 있는 원이 끝없이 두 갈래로 영원히 진행하는 모양인데, 저는 대여섯 번 반복되는 고리 구조로 만들어 고스트 댄서, 궤도 댄서로 표현했죠.”

끝없이 갈라지는 ‘가능세계’

김아영은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부터 오희정 프로듀서를 비롯해 영화계 스태프와 꾸준히 작업해왔다. 무빙이미지 제작 영역에선 블록버스터급 스케일의 작품인 만큼 전문가의 참여가 꼭 필요했다. 영화인들과 작업하는 과정이 처음부터 쉬운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호흡이 맞는다고 말한다.
개인전 《문법과 마법》을 구성한 작품 중 <궤도 댄스>2022 연작의 조형물은 공업 디자이너가 모델링과 감수를 하고, 제작은 종로에서 주얼리 디자인을 하는 숨은 고수 제작자와 진행했다. “황동으로 만들어 니켈 도금하는 공정인데, 조형물의 두께를 0.1mm까지 얇게 만들 수 있는 분이 종로에 계시더라고요.”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2017, 단채널 영상, 21분 20초, 2018 광주비엔날레 전시 전경

월페이퍼 설치 작품인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2022은 웹툰 작가 1172와 협업하는 대담한 시도가 돋보인다. “전시를 통해 반드시 성취하고 싶은 두 가지 목표가 있었어요. 하나는 개념적 미로를 만들어 물체로 형상화하는 도전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GLGirl’s Love 서사를 넣는 거였죠. 자연스럽게 GL 작가와 협업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여성 라이더 모임인 ‘치맛바람 라이더스’ 멤버 다섯 명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웹툰 작가 1172였죠. 1172는 실제로 산악바이크를 타는 사람이면서 바이크 타는 여성을 소재로 GL 만화를 창작한 작가거든요. 사실 그전부터 그의 작품을 봐왔고, 막연히 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나게 됐고요. 남성 퀴어 문화는 어느 정도 주류가 됐고 트렌디하면서 패셔너블한 것으로 인식되는 반면, 여성 퀴어는 상당히 늦은 것 같아요. 한국미술 신은 특히 느려서 아직도 GL 코드가 주류 미술관에 들어간 적이 별로 없어요. 갤러리현대가 주류 갤러리인만큼 반드시 GL 코드를 갖고 들어가겠다고 다짐했어요.”
김아영의 무빙이미지 작업은 리서치에 기반하지만 스토리를 가지고 시공간을 조직하는 픽션이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주인공이 물류센터로 들어오면서 어떤 흐름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실사 이미지의 액션과 가상세계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어떻게 구성했을까.
“저는 실사와 가상세계 사이의 차이를 못 느끼고 작업했어요. 이미지가 잘 붙더라고요. 라이더는 미친듯이 달리면서 본능적으로 도로를 보지만, 동시에 애플리케이션 화면도 봐요. 한 눈은 도로를, 다른 눈은 앱을 위험하게 바라보거든요. 이미 신체 감각의 대부분이 두 세계를 쪼개는 게 아니라 두 세계에 공평하게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현실을 지각할 때도 레이어가 여러 개 있어서, 특히 게임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상상이 포개지듯 가상세계가 침투하는 기시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VR 작업을 하면서도 많이 느꼈어요. VR은 영상 작업과 달리 편집할 수 없고, 공간 체험물에 가깝다 보니 종종 당황스럽더라고요. 이걸 가지고 어떻게 유의미한 매체 작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VR이 과몰입을 위한 매체라고 보고 이 과몰입을 깨는 외부의 목소리를 집어넣는 시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세계에 균열을 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제삼자의 목소리, 서사 공간 밖 존재, 스토리텔러라는 가상 존재의 목소리를 넣으려고 했어요.”
<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에 나타난 지질학의 다공성 개념과 물리적 데이터의 이주, <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라이더가 달리는 다차원의 미로처럼, 어딘가를 가로지르거나 빠져나가는 움직임을 구현하는 작업과 관련해 구멍이나 탈출에 대한 집착은 없는 것일까.

<이페메랄 이페메라> 연작, 2007-10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다만 제게는 세계가 두꺼운 벽처럼 느껴지곤 해요.<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여성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Ernst Mo(monster의 철자 순서를 바꾼 애너그램)와 같이 벽 안에 있는 존재들에게 이야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면 구멍이 돌파구가 될 수는 있겠네요. <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때처럼 세계를 뛰어넘는 기술 정도로는 재미있게 쓰고 있어요. 마치 몽타주의 충돌처럼 붙지 않는 것들을 붙이면서 무언가를 도약시키고, 느닷없이 이동시키는 장치가 되어주죠.”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실내에 가두던 때, 우리들의 생존을 책임져준 얼굴 모르는 배달 라이더의 노동을 접하면서 작가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자동화 시대의 비정규 고용 노동자층)에 속하는 특수한 직종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소비자와의 접촉이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물류 보관소의 기능만을 가진 ‘다크 스토어dark store’에도 흥미를 느꼈다. 작가가 흥미를 보이는 이 특수한 직종과 공간들은 현재 진행 중인 미래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추구하는 사변적 픽션의 특징은 이런 사회적 현상의 단면을 단지 소재로 활용하거나 정치적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작품 설명을 이렇게 기술한다.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이 제시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한 세계들의 사태들이다. 이는, 두 개체가 존재할 수도 있는 방식들이며, 나아가 두 개체가 서로에 대해 존재할 수도 있는 방식들이다.”
작가는 현재 호주 ACMI Australian Centre for the Moving Image에 솔로 커미션 작가로 선정돼 설치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 작품은 2년간 상설 전시될 예정이다.
“다중우주, 토착적 내비게이션, GPS가 나오기 전의 도구들과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 개념 등을 조사하다가 폴리네시아 스틱 차트Polynesian Stick Charts라는 항법 장치와 우리나라 윤도까지 발견했어요. 특히 윤도는 동서남북, 캘린더, 오성, 우주, 주역, 풍수가 전부 들어간 코스모테크닉스고, 천체를 읽는 점성학과 천문학까지 연결되더라고요.”
고대와 미래를 넘나드는 호기심으로 종횡무진 자료를 모으고 있는 그는 인도 잔타르 마타르 천문대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의 아름다움과, 황도를 기준으로 24절기를 정하는 시헌력의 원리에 감탄한다. 개념과 재료를 찾는 리서치 작업과 병행하는 그의 미학적 탐구는 이제 인간 몸의 움직임이 발생시키는 원초적 힘에 닿아 있다. 그는 모션캡처를 이용한 작업의 한계를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 몸짓으로 극복하고자 최근 안무가 황수현과 작업하기도 했다. 무용수들과 협업한 모션캡처 작업에서 위로받았다는 작가는 최근 2년간 겪은 심리적 답답함에서 이제야 좀 벗어난 것 같다고 담담히 말한다.

“아티스트는 자기 자신의 밑바닥과 대면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작업실 밖 외출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직관력을 키우는 책을 보기도 하고요. 기력 있는 사오십 대에 좀 더 집중해서 양질의 작업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멀리 작업실 벽 화이트보드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작업”, “모호함의 테크놀로지”, “잔인성”. 이 글자들을 읽자, 김아영 작가가 말했다.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이런 문구가 있었어요.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항상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김은희 독립 큐레이터
사진 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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