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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너를 내 안에 들이는 마음 - 너나들이

너를 떠올려보자.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든, 뒤에 서 있는 사람이든,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든 누구나 ‘너’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너’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마도 친밀감일 것이다. 동갑내기를 만나 처음으로 수줍게 ‘너’라고 불러보았을 때, 그제야 친구가 되었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나’가 바깥으로 팔을 쭉 뻗는다면 ‘너’는 제 안쪽을 향해 몸을 웅크리는 글자다. 도무지 곁을 내줄 것 같지 않다. 나는 다가가고 너는 철벽 방어를 한다. 너를 속속들이 알지 않으면 마음을 열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지금껏 무수한 ‘나’들이 ‘너’를 그토록 애달프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너와 내가 만나는 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둘도 없는 사이가 되는 일, 기쁨을 공유하고 아픔을 나누는 일은 모두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과정이다. 각자의 기호嗜好가 한데 모여 우리의 취향이 되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동체는 단단해진다. 혼자서는 할 수 없던 일을 함께 해내기도 하고, 같은 장면을 마주해도 생각과 감정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달으며 상대의 존재를 선명하게 새기기도 한다. 이미 가까워진 너와 내가 하는 일은 전부 상호작용이다. 싸울 때조차 일방적으로 혼내거나 다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너와 내가 다투는 것이다. 힘을 합칠 때도, 그 힘을 쏟아부을 때도 상대가 필요하다. 네가 절실하다.

이 모든 게 너를 내 안에 들이는 일일 것이다. 너를 내 안에 들이면서 너와 나는 시나브로 닮아간다.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의 얼굴이 닮는 것도, 우정을 길고 깊게 나눈 친구들의 말투가 비슷해지는 것도 서로를 제 삶에 들였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들이는 일은 서로를 물들이는 일인 셈이다. 입맛부터 영화 취향까지 닮게 된 사람들이 이별하게 되면, 들였던 네가 빠져나가 가슴이 허하다. 뻐근한 몸으로 발길을 한 곳에는 어김없이 우리가 남긴 흔적이 있다. 함께 손뼉 치며 기뻐했던 순간도,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슬퍼했던 순간도 거기 그대로 있다. 내 안에 들였던 네가 지금 내 눈앞에 없다는 사실만 더욱 생생해진다.

‘너나들이’라는 단어가 있다. 언뜻 ‘너’와 ‘나들이’의 결합어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말을 건넴. 또는 그런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나들이도 “너니 나니 하고” 부를 수 있는 가까운 사람과 해야 더한층 즐거울 것이다. ‘너’와 ‘나’의 복수를 주어로 삼아 만든 말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때 ‘너나들이’는 ‘우리들이’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규모도 커질 것이다. 너나들이할 수 있는 이들이 주변에 많다는 사실은 단순히 친구가 많다는 것과는 다르다. 서로에게 깃들기 위해서는 나와 네가 둘 다 노력해야 한다. 너를 내 안에 들이는 마음은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연상의 끝에서 ‘너’와 ‘나’로 다시 돌아온다. ‘나’가 먼저가 아니라 ‘너’를 먼저 썼다는 데서 상대가 없으면 나의 존재성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사람은 단독자로 존재하지만, 그 사람의 개성은 관계를 통해서만 빛을 발한다. 제아무리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도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종일 입이 근질거릴 것이다. 탁구를 잘 치는 사람이 벽을 상대로 경기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풀에 지쳐버릴 것이다. 탁구를 영어로 ‘핑퐁Ping-Pong’이라고 하는 것도 ‘핑’과 ‘퐁’이 함께 있어야만, 치고받음이 마침내 ‘치고, 받음’이 되어야만 경기가 완성될 수 있어서일 것이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네가 필요하다.

‘너나들이’에서 중요한 것은 “허물없이”일 것이다. 허물은 “잘못 저지른 실수”나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거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잽싸게 들추어내기도, 야멸차게 덮어씌울 수도 있는 게 바로 허물이다. “허물없이”는 관계에 있어 실수와 비웃음거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가 실수하거나 설령 비웃음을 살 행동을 할지라도 눈감아주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이때 의지는 이루고자 하는 강력한 마음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와 ‘나’를 호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위기에 더 가깝다. 흔히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신뢰감”으로 알려진 ‘라포rapport’ 또한 하루아침에 생성되지 않는다. 너나들이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인정하는 데에도, 상대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이’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이는 기본적으로 거리, 시간 혹은 관계를 상정하는 개념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이는 결코 좁혀질 수 없다. 너와 나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시간’을 들여 ‘관계’에 힘을 쏟았기에 ‘우리’라는 말은 다정함을 품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내 의견만 내세우거나 매 순간 너에게만 의지했다면 너와 나는 나란히 설 수도,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너나들이’를 붙여 쓰는 것처럼, 너를 내 안에 들이는 마음은 허물을 허무는 일일지 모른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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