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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멈출 수 없는 순간 고통이 된다

어릴 적 읽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는 제게 끔찍한 잔상을 남겼습니다.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이 춤을 멈출 수 없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사형 집행인을 찾아가 두 발목을 도끼로 잘라내지요. 심지어 잘린 발목이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춤추며 사라집니다. 춤이란 즐거운 것인 줄 알았는데, 춤추는 게 형벌이라니요. 무엇이든 멈출 수 없는 순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유불급. 아무리 좋은 것, 즐거운 일이라도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합니다. 초코 케이크일지라도요. 로알드 달Roald Dahl의 동화 <마틸다>에는 악덕 교장 선생님의 초코 케이크 한 조각을 훔쳐 먹다가 걸린 브루스가 전교생 앞에서 거대한 초코 케이크 한 판을 먹어야 하는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기만 해도 목 막히는 꾸덕꾸덕한 케이크를 고통스럽게 입으로 욱여넣는 브루스의 고통만큼 모순적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 됩니다. 춤도 마찬가지입니다. 춤추는 형벌은 낭만발레 <지젤>의 모티프입니다. 춤추길 좋아하는 시골 처녀 지젤은 신분을 속이고 마을에 나타난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아 죽습니다. 심장도 약한데 그렇게 춤추다간 처녀 귀신 윌리가 될 거라는 엄마의 경고가 현실이 되었죠. 달빛 어린 밤 지젤의 무덤에 찾아간 알브레히트는 처녀 귀신 무리인 윌리들에게 잡혀 죽을 때까지 춤추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속 춤추라, 지쳐도 춤추라, 춤추다가 죽어라. 윌리의 우두머리 미르타가 명령합니다. 알브레히트가 지쳐 쓰러져도, 윌리가 된 지젤이 나서서 간청해도 윌리의 우두머리 미르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다시 일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끝없이 뛰어오르고 무대를 가로지릅니다. 윌리 무리와 알브레히트가 한참을 춤추다가 음악이 멈췄을 때 바닥에 쓰러진 유일한 이는 알브레히트입니다. 귀신은 지치지 않으니까요.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과로하면 지칩니다. 미르타의 명령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러니는 알브레히트가 지칠 때까지 춤추는 형벌이 관객에겐 남성 주역 무용수의 기량을 마음껏 감상할 기회라는 점입니다.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두 발을 세 번 교차하고 내려오는 앙트르샤 시스entrechat six를 서른두 번 반복하는 비르투오소가 형벌의 명목으로 펼쳐집니다. 관객도 미르타인 셈이죠. 여느 작품과 달리 무용수가 지쳤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돼서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반문합니다. ‘그래봤자 작품 속 설정에 불과하잖아요?’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쓰러질 때까지 춤추던 이들도 있습니다. 1920~30년대 미국에서는 누가 더 오래 춤추는가를 겨루는 댄스 마라톤dance marathon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동네 사람들이 즐기던 소박한 행사였지만 점차 전문 댄서들이 참여하고 규칙도 복잡해졌습니다. 한창 인기 있을 때는 경기가 몇 날, 심지어 몇 달간 지속되었습니다. 하루 24시간 춤춘 것은 아니고 한 시간마다 15분 쉬고,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화장실에 가고, 관객이 지켜보는 와중에 짧은 잠도 잤다고 하네요. 그래도 그게 가능키나 한가요. 사람들은 마치 경마장에서 경주마에게 판돈을 걸듯 참가자들에게 돈을 걸고, 응원하고, 이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몇 날 며칠 멈추지 않고 춤춘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지친 파트너를 깨우기 위해 흔들고, 찌르고, 꼬집었습니다. 무릎이 땅에 닿으면 탈락하기에 참가자들은 굵은 줄 위로 몸을 빨래처럼 걸친 채 쉬었고, 시체처럼 축 늘어진 파트너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지탱하려 애썼습니다. 공식 최장 기록은 무려 4,152시간 30분으로, 다섯 달이 넘습니다. 다섯 달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춘다니 노동을 넘어 형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춤춰야 했나요? 카렌도, 알브레히트도 아닌데 멈추면 되지 않나요? 사행성을 띤 댄스 마라톤에는 일반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상금이 걸려 있었습니다. 댄서들은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춤췄습니다. 댄스 마라톤은 춤이라기보다 체력 싸움, 정신력 싸움이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몸을 구경하는 이들의 심리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피로와 잠에 맞서 버티는 몸을 보며 대공황 시대라는 암담한 상황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과로가 스펙터클인 사회는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댄스 마라톤도 사그라졌습니다. 전쟁이 새로운 스펙터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직업 무용수에겐 춤이 노동입니다. 오늘날 무용수들은 과로를 경계합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근면한 이들이지만 기분에 취해 무리했다간 여러 날의 컨디션이 망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좋은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선 잘 쉬어야 합니다. 오히려 과로하며 춤추는 이들은 어린 학생들입니다. 냉혹한 무한 경쟁 시대는 이들에게 글로벌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속삭이지요. 학생들은 희망과 부담감을 원동력 삼아 까마득히 높은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갑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을 감당하지만, 이를 자각하거나 여기서 벗어나긴 어렵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혼자 멈추면 도태된다고들 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떼처럼 무리를 지으면 거친 물살을 버티기가 조금 수월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무용계는 춤추다가 조로早老한 이들로 가득합니다. 무용계만 그런 것도 아니겠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을 때, 그리고 멈추어야 할 때를 스스로 깨달을 때 우리는 즐겁게, 오래오래 춤출 수 있습니다.

정옥희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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