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1월호

리처드 3세가 미국 고등학생이 됐지만 여전히 악인인 이유 국립극장 기획 무장애 공연 〈틴에이지 딕〉

극립극장 기획 무장애 공연 〈틴에이지 딕〉 현장

원작 《리처드 3세》에서 왕위를 찬탈한 리처드 글로스터는 〈틴에이지 딕〉에서 뇌성마비 고등학생으로 변모한다. 〈틴에이지 딕〉은 학생회 서기 리처드가 인기 많은 교내 미식축구팀 쿼터백이자 ‘일못(일 못하는 사람)’ 학생회장 에디를 물리치고 새로운 학생회장이 되기 위한 고군분투를 담은 매운맛 하이틴 연극이다. 리처드는 혼자 있을 때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모략을 꾸민다. 리처드가 혼자 공상에 빠질 때마다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깔리는데 원작 대사를 인용하는 등 오래된 어투를 사용해 그의 음침한 속내를 한층 부각한다. 리처드가 떠나는 회장 자리 찬탈 여정은 멀고도 위험하다. 리처드는 그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자신의 다름을 기꺼이 내주고 배로 갚는다.
리처드의 권력을 향한 욕망과 앤과의 사랑은 긴장감을 유지하며 대립한다. 리처드는 모략의 일환으로 에디의 전 여자친구인 앤에게 접근한다. 이는 댄스파티에 퀸카 앤을 데려가 권력을 얻고자 함이다. 리처드는 연습실에서 앤에게 춤을 배우며 넘어지고, 솔직해지고, 함께 춤추고, 사랑을 확인한다. 앤 역시 리처드에게 투명해지며 에디와 헤어진 비밀 사유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리처드는 이 비밀을 악용함으로써 결국 앤에게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상처를 주었고, 앤은 생을 끝낸다. 소문을 듣고 와글와글 떠들어대던 익명의 트윗들은 금세 앤을 추모하기 시작한다. 리처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악의 길을 달린다. 유령이 된 앤의 말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종내 그가 달달 외우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반대하는, 아무 생각 없이 잔인한 수단만 사용한 악인 지도자에 종착한다.
이번 공연은 국립극장 기획 무장애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됐다. 극장에 들어선 뒤 티켓을 받고 프로그램북을 넘기며 좋은 의미로 거듭 경악했다. 첫 번째는 페이지 수가 많은 프로그램북을 무료로 배포했기 때문이다. 보통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프로그램북은 유료로 판매한다. 또한 프로그램북의 큰 판형, 큰 글씨, 빼곡한 점자 인쇄는 공연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등장인물 수와 수어 통역사의 수가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공연 수어 통역사의 고충을 들은 적이 있다. 이를테면 수어 통역 시 소모되는 체력, 많은 배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어 통역사, 교대할 시간이 없는 경우 등에 대해 말이다. 수어 통역사는 퍼포머이기도 하지 않은가. 여태껏 본 공연 중 수어 통역사의 수가 제일 많았기에 열두 명의 퍼포머가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기대하며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공연이 시작되면 등장인물과 같은 디자인의 무채색 옷을 입은 수어 통역사가 인물과 함께한다. 이들은 배우의 말을 통역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배우로 둔갑해 극 안의 군중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이크 루는 희곡 등장인물 소개에서 ‘리처드’와 ‘벅’ 역을 장애인 배우로 섭외할 것을 힘줘 썼다.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다름을 ‘공존하는 다름’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무대는 뒤쪽에서 앞쪽으로 점점 낮아지는 경사진 교실 마룻바닥 형태다. 계단이 아닌 경사로 높낮이를 만든 무대는 누구든 그곳을 누빌 수 있음을 전제한다. 리처드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무대 안에서 악인이 된다. 무대 제일 깊은 벽 중앙에는 미닫이문이 있다. 문 위쪽 벽은 자막 해설이 투사되는 스크린으로 사용되고, 양옆 벽에는 등장인물의 심리 혹은 특징을 보여주는 영상이 투사된다. 뒷벽에는 자막이 역동적으로 영사되는데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강화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배우가 발화하는 말보다 자막 영상이 앞서 나와 나의 들을 차례를 빼앗기기도 했다. 배우에게 시선을 고정하려고 애를 써야 비로소 그들의 말과 몸이 표현하는 바를 들을 수 있었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번 공연은 리처드의 원톱 연극이다. 긴 시간 동안 리처드는 혼자 키득거리고, 방백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고, 극이 진행될수록 무대를 점점 넓게 사용하고, 학교 곳곳을 자유롭게 누빈다. 그는 음침한 모습, 친숙한 모습, 고민하는 모습, 사랑에 빠진 모습 등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며 입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찰진 개그 소유자인 벅과 전형적 미국 하이틴 영화 남자 주인공 같은 에디, 리처드에게 자신의 오빠를 투영하는 엘리자베스, 보수적 종교관에 따라 살고 싶지만 억눌린 화가 불쑥 튀어나오는 클라리사, 개인의 아픔을 춤으로 이겨내고자 애썼으나 단숨에 이용된 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딱히 성악설을 믿지 않는 나는 희곡 속 대단한 악인을 볼 때면 늘 이해에 실패하고 만다. 이번 역시 완벽한 이해에는 실패했지만 이 해결되지 않은 여백에서 〈틴에이지 딕〉은 계속 질문한다. 왜 장애인은 애초부터 출마 후보가 아닌 유권자로 상정되는지, 왜 리처드는 이렇게까지 고작 지루한 도시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일 뿐인 권력에 집착하는지, 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악을 향해 질주하는지. 극 중 리처드는 묻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나친 잔인함은 미움을 부른다고 말했는데 만약 태어날 때부터 미움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그 잔인함을 멈추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이서연_리뷰 쓰고 싶은 사람이자 종종 사진 찍고 가끔 연극 만드는 시트콤 중독자입니다. 언제나 관객이고 싶습니다. | 사진 제공 국립극장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