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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MZ세대, 아날로그에 빠지다 레코드판·필름·편지·신문의 매력

아날로그 콘텐츠를 보고 만지고 듣고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LP의 판매량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주기적으로 눈에 띄고, 지난 1월에 열린 서울레코드페어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판 LP를 구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촬영 후 결과가 바로 보이는 디지털 사진 말고 현상과 인화 이후에 나타나는 필름 사진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요즘 젊은이 말이다.

제10회 서울레코드페어 현장

추위쯤이야 상관없는 바이닐 구매 욕구

지난 1월 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한 호텔에서 시작해 블록을 한 바퀴 감싼 수백 명의 대기 행렬을 궁금하게 여긴 행인이 물었다. “여기 무슨 줄이에요?” “서울레코드페어요.” “그게 뭐예요?” “LP요, LP 사는 줄이에요.”
“아….”
영하의 추운 날씨에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선 이들은 서울레코드페어에서 판매되는 한정판 바이닐Vinyl, 레코드판을 사기 위해 하염없이 지루한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전날 늦은 밤부터 시작한 대기 줄은 새벽 3시 30분쯤 20명, 5시에 60명, 7시엔 100명을 넘어섰고 행사가 시작하는 오전 11시엔 800여 명으로 늘었다. 행사장을 기점으로 블록을 한 바퀴 휘감을 정도였다. 코로나19로 2020년, 2021년에 열리지 못하는 사이 LP 시장 규모가 급격하게 커졌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이날 서울레코드페어에 참여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한겨울의 날씨가 무색할 만큼 뜨거웠다.
오마이걸·최백호·클래지콰이·이랑·윈디시티·김사월×김해원·강아솔 등 적게는 100여 장에서 많게는 1,000장 이상 판매된 한정판 LP의 개별 가격은 3만~6만 원 사이. 휴대전화만 있으면 1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 내내 언제 어디서든 전 세계의 수많은 음악을 무제한 즐길 수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결코 저렴하다고 할 만한 가격은 아니다. 그런데도 일부 음반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날 서울레코드페어를 찾은 이들 대부분은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하는 2030 젊은 MZ(밀레니얼+Z세대)세대였다. 현장에서 만난 30대 회사원 박종현 씨는 “주위 친구들을 봐도 LP를 레트로로 느끼기보다 새롭고 힙한 유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턴테이블에 LP를 올리고 바늘을 내려서 듣는 것 자체가 스트리밍과 비교할 수 없는 재미가 있어요. 물론 주위에는 턴테이블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LP를 모으는 친구들도 있어요. LP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큰 재킷에 담긴 사진이나 그림이 주는 물리적 만족감이 있죠. 인스타그램으로 자랑하기에도 좋고요. 품절되고 나면 가격이 오르니 재테크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아져서 아쉽긴 하지만요.”
아날로그의 부활에 귀한 대접을 받는 LP도 늘었다. 아이유가 2014년 발매한 <꽃갈피> 앨범의 한정판 LP는 현재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백예린·잔나비 등의 LP도 수십만 원에 거래된다. 몇 년 전만 해도 1만~2만 원에 구입할 수 있던 유재하·이문세·산울림·들국화 등 해묵은 중고 LP 또한 MZ세대의 수요가 늘면서 2배 이상 뛰었다. 새로 제작되는 LP는 공급이 부족하다 보니 인기 제품의 경우 아이돌 콘서트나 인기 뮤지컬 공연 ‘피케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케팅을 가리키는 신조어’처럼 판매를 시작한 지 1분도 안 돼 순식간에 매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열풍을 넘어 광풍이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현상은 수요와 공급의 비대칭에 따른 것이지만 전 세계적 아날로그의 인기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선 2021년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LP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질렀다. 미국 음반 판매를 집계하는 MRC 데이터에 따르면 2021년 미국 내 LP 판매량은 4,172만 장으로 2020년 대비 50% 이상 늘었다. K팝 그룹이 장악하고 있는 국내 음반 시장은 여전히 CD가 주도하고 있지만 LP 시장의 성장세는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LP를 생산하는 마장뮤직앤픽처스의 하종욱 대표는 “공장 문을 연 2017년엔 연간 제작 수량이 2만 장 수준이었는데 2021년 20만 장으로 늘었고 그마저도 주문이 6개월 정도가 밀려 있다”고 말했다.

손으로 만지고 흔드는 즐거움

LP에 비해 필름 사진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취미다. LP는 턴테이블이 없어도 장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필름 사진은 필름을 구해 카메라로 촬영한 뒤 현상하고 인화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사진이라는 실물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LP 공장이 늘고 레코드 생산량이 급증하는 것과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디지털에 밀려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던 필름 산업도 조금씩 부활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2012년 파산보호 신청 후 기사회생한 코닥은 코닥 알라리스와 이스트만 코닥으로 분할된 뒤에도 코닥 알라리스를 통해 필름 생산을 계속하고 있고, 사업 영역을 다각화한 후지필름도 필름 라인업을 축소했지만 제품 생산을 멈추지 않고 있다. 코닥 알라리스 측은 2021년 한 미국 매체와 인터뷰에서 “필름 산업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면서 “아날로그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2016년 이후 필름 제품 수요가 늘고 있다. 최근 필름 소비자의 3분의 1이 35세 이하라는 업계 조사처럼 아날로그 사진은 젊은 층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밝혔다.아날로그 사진의 인기 덕에 최근 몇 년 사이 필름 카메라 가격은 크게 올랐다. 유명 연예인들이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아날로그 사진은 힙한 멋이 됐다. 배우 박보검이 드라마에서 들고 나와 인기를 끈 니콘 수동 카메라 FM2는 ‘박보검 카메라’라는 별명이 생겼고, 라이카의 M10은 류준열이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며 ‘류준열 카메라’로 불린다.
아날로그 필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장소도 하나둘 늘고 있다. 서울 중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인근에 있는 필름로그도 그중 하나다. 다양한 필름 카메라와 일회용 카메라, 필름을 판매하고 있고 현상과 스캔도 해준다. 일회용 카메라를 재활용해 저렴하게 판매하는 자판기도 인기다. 주요 고객이 중·장년층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젊은 층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필름로그 관계자는 “이곳을 찾는 고객의 90%가 20~30대”라고 했다.
을지로의 현상소 겸 사진관인 망우삼림, 성수역 인근의 카메라 잡화점 디스코너, 연남동의 현상소 연남필름, 직접 필름을 스캔할 수 있는 충무로의 고래사진관 필름현상소 등도 모두 2030세대 아날로그 사진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흑백필름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주는 연희동사진관과 물나무사진관도 마찬가지. MZ세대는 왜 다루기 까다롭고 불편한 데다 비용도 많이 드는 필름 사진을 찾는 걸까. 망우삼림에서 만난 한 20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필름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셔터 소리, 필름 감는 소리, 필름 사진의 질감과 노이즈가 좋아요. 필름 가격이 비싸다 보니 한컷 한컷 조심스럽게 찍게 되죠. 그렇게 찍고 나서 현상할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고요.”
아날로그 사진은 잃어버린 ‘사진’을 되찾게 해줬다. 디지털 파일로 바뀌어 메모리카드와 하드디스크에 잠자고 있던 사진을 직접 만질 수 있게 한 것이다. 폴라로이드 필름을 부활시킨 ‘임파서블 프로젝트’ 설립자 플로리안 캡스는 유명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의 베스트셀러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화질이라서 화질이 개선되기만 하면 디지털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더 이상 가족 앨범은 없고 인화된 사진도 없어요. 손으로 만지거나 흔들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지요.”

필름로그 현상소 @filmlog_official

불편한 짓이 재미있는 이유

아날로그의 인기는 뜻밖의 영역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서울 연희동과 성수동에는 이메일이 아닌 손편지에 관한 물품을 파는 매장 ‘글월’이 있다. 편지지나 봉투·잉크·필기구 등 편지와 관련된 제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라는 점도 이색적인데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서비스가 있다. 생면부지의 타인과 주고받는 펜팔 서비스가 그것이다. 매장 안에서 편지를 쓰고 카운터에 접수한 뒤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한 통 가져가는 방식이다. 종이에 글씨를 쓴다는 것도 아날로그적이지만 봉투에 체크된 몇 가지의 형용사만을 보고 타인이 쓴 편지를 선택하는 것 역시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편지 쓰기라는 정서적 행위에 공감하는 이들끼리 나누는 교감이기 때문이다.
종이 신문 기사를 잘라 사진으로 올리는 소셜미디어 계정도 인기다. 인스타그램 ‘6DP6일신문, 6days.paper’ 계정 운영자는 매일 인상 깊게 읽은 신문 기사를 자른 뒤 이를 촬영해 올린다. 링크만 복사해 붙이면 손쉽게 온라인 기사를 옮길 수 있지만, 이 계정은 때로 구겨진 종이를 자르고 강조하고픈 문장에 밑줄을 긋거나 코멘트를 붙이는 수고를 감수한다. 2021년 5월 계정을 열었는데 1년도 안 돼 팔로어가 2만 명 가까이 늘었다. 이 계정을 팔로잉하는 이용자 대부분은 MZ세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아날로그를 다루는 행위에는 아이러니한 즐거움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디지털보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어서 더 매력적인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MZ세대는 물론 모든 세대가 아날로그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하드 드라이브의 음악을 꺼내 듣는 것보다 더 큰 참여감을 주고, 궁극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레코드판이 꽂힌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재킷 디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행위, 그리고 레코드판의 표면을 긁는 듯한 음악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직전 1초 동안의 침묵.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손과 발과 눈과 귀, 심지어 (레코드 표면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가끔은 입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감각을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레코드판이 주는 경험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재미있는 경험이다.”

고경석 《한국일보》 기자 | 사진 제공 서울레코드페어 사무국, 필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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