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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기댈 곳

웹진 [비유] 43호의 <쓰다> 포스터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말이 거슬리는 순간이 있다. 기쁘거나 평온할 때와 달리 누군가와 함께여도 여전히 불안하고 외로우면 저 문장에 반감이 든다. 문득 마음 기댈 곳이 없다는 느낌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과정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서울에서 파주로 이사를 결심한 일이, 몇 달 전 아이를 새 유치원으로 옮기기로 한 결정이, 그끄저께 우리 거실에 꼭 필요한 듯 보이던 소파를 구매하게 만든 욕망이 하나같이 의심스러워진다. 그럴 때면 나는 우연적이거나 감정적인 수많은 선택에 대해서도 합리적 이유를 끌어다 붙인다. “그건 올바른 선택이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 결과적으로 일이 잘된다면 내 자존감도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급히 처분한 서울 집값이 폭등하거나 아이가 새 유치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새로 산 소파가 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생활 리듬과 집안 사정이 엉망이 돼간다고 느끼는 순간, 그런 모든 나쁜 결과가 전부 내게서 비롯됐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깊은 구덩이에 갇힌 기분이다. 그런 구덩이 속에 오래 빠져 있다 보면 기댈 곳이 없다는 막연한 느낌이 기댈 곳을 영 잃어버렸다는 확신으로 굳어질 것만 같아 두렵다.

컬러 필드의 링은 성적 페로몬에 따라 색을 드러냈다. 색은 날마다 조금씩 변했지만, 처음 색에서 크게 벗어나
지 않았다. 상황에 맞춰 가까이하고 싶은 색도 달랐다. 우위를 점하는 색은 없었다. 어떤 배색인지, 어떤 조화
를 이루는지가 중요했다.
박문영, <컬러 필드> 부분

박문영 소설이 그리는 미래 도시는 이런 모습이다. 시내에는 가축을 덜 착취하는 방식으로 시민에게 단백질을 제공하는 밀웜 식당이 들어선다. 주인공이 참여 중인 녹말 도시락 용기 만들기 수업은 환경보호에 이바지한다.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행에는 공생저해법이 적용돼 안드로이드가 벌금을 부과한다.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페로몬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링’을 착용한다. 사랑할 상대를 효율적으로 찾기 위해서 색의 조합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다음과 같은 통계도 가능하다. “매트 오렌지와 소프트 카키는 전체 누적 커플 중 단 3.2%였다. 매치 성공률은 16%, 커플 각자의 예상 만족도는 12.1%에 불과 했다.” 박문영의 세계에서 결혼은 점차 사라지고 컬러 필드의 청년들은 다양한 연애 경험을 쌓아간다. 이처럼 ‘컬러 필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때그때 적당한 상대를 찾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기에 ‘죽기 전 100번의 연애’ 같은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런 이들과 섞여 살면서도, 가짜 링으로 자기 색을 감춘 채 한 명의 애인(백환)과 4년째 동거 중인 여성 안류지. 그는 컬러 필드라는 세계가 추구하는 빠른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안정적 연애에 만족한다. 당연히 이 커플은 서로의 색을 궁금해한 적이 없다. 그랬던 류지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진짜 만지고 있는데도, 만지는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노력과 타성을 분간할 수 없
었다. 안류지는 낮에 센터 계단에서 품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한두 해의 교제 기간을 넘기면 나머지 시간
은 덤처럼 쌓일 수도 있지 않나.
박문영, <컬러 필드> 부분

소설은 끝내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한두 해의 교제 기간을 넘기면 나머지 시간은 덤처럼 쌓”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새로운 연애 감정이 선사하는 어지러운 열정보다는 둘 사이에 쌓인 긴 시간 속 안정감에 끌리는 사람일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컬러 필드’의 사람들처럼 살고자 한다. 얼마간 퇴색된 연애 감정 끌어안고 그것을 살려보려 애쓰는 자를 어리석다 여길 것이다.
류지는 녹말 도시락 용기 만들기 수업에서 만난 여성의 녹색 링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는 궁금해진다. 자신과 애인 백환의 컬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문득 외롭고 불안해졌기에 류지는 확인하고 싶어진다. 4년째 동거 중인 백환과의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자기 선택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새로 나타난 여성에 관한 관심을 끊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류지는 합리성의 상징인 ‘컬러’에 사랑에 관한 결정을 외주 맡긴다는 점에서 우유부단한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소설 속 안류지와 백환의 연애를 보면서 내가 사랑에 거는 기대가 어느 쪽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비좁은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나를 그곳에서 꺼내주기를 바란다. 사랑 자체에 관한 의혹이 든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당신은 과연 진짜 사랑인가? 당신이 진짜라면 어째서 나의 마음이 종종 이토록 흔들리는 것이지?’ 내가 당신을 선택한 모든 합리적 이유가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이 한낱 우연과 감정의 산물임이 밝혀져 내가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뒤돌아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순간에도, 어쩌면 덤처럼 쌓여온 시간을 무기로 당신이 나를 붙잡아주지 않을까? 우리가 사랑한 긴 시간만큼 결정적이고 합리적인 사랑의 이유가 따로 존재할까 싶다.

김잔디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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