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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서울문학기행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타샤를 찾아서, 목소리를 찾아서

‘나타샤, 나타샤….’ 시 쓰는 가난한 청년이 애달게 부른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누구일까.
“오늘날까지 정체가 분분하죠. 백석 시인을 평생 사랑했던 자야 여사는 ‘나타샤는 나!’라며 강한 확신을 가졌는데요, 혹자들은 백석이 20대에 짝사랑한 이화여고보생 박경련이 ‘나타샤’라고 말합니다.”
7월 3일 오후 1시께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서 백석을 연구해온 박미산 시인이 말했다.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옛 대원각)를 보시했던 자야의 공덕비가 놓인 마당에서였다.
옹기종기 모인 40여 명의 시민들은 쑥덕거렸다. “자야 여사님이 땅 속에서 다 듣겠네!”

1 서울문학기행을 위해 평화의 소녀상 앞에 모인 사람들.
2 성북예술창작터.

‘반골 기질이 만든 동네’ 성북동 문학기행

이른 아침이었다. 배낭을 멘 사람들이 4호선 한성대입구역 근처 평화의 소녀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도시문화연구원이 진행하고 서울시가 후원하는 ‘서울문학기행’ 네 번째 모임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편을 찾은 이들이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눈 대신 땀이 뻘뻘 나는 현장이었다.
시민들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기회거든요. 서울에 살면서 서울을 잘 모르는 데다, 혼자 하기 어려운 문학기행을 그 분야 전문가들의 해설을 들으며 할 수 있으니 좋잖아요. 경쟁률도 엄청 높아요. 저는 벌써 세 번째 참가하는 거예요.” 1년 동안 회사를 휴직한 참에 의욕을 가지고 서울 여행을 해보겠다는 한 참가자가 말했다.
길마다 집이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도보여행은 ‘집’에서 ‘집’으로 이어졌다. 공간만 거슬러 올라도 문학사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동네가 성북동이다. 박미산 시인은 성북동에서 45년을 살았다. 박 시인은 성북동을 “반골 기질이 만든 동네”라고 했다. 문인을 포함해 저항의식과 민족주의 정신이 또렷한 예술가들이 일찍부터 동네에 터를 잡았다는 뜻이다.
성북동 문학기행의 출발점인 ‘성북예술창작터’(성북로 23)는 지역 내 다양한 실험예술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조선 후기의 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이 붓을 휘둘렀던 곳이다. 틀에 얽매이길 싫어했던 기인의 활동 무대를 지나 골목 어귀로 들어서면 잘생긴 소나무가 중정을 지키는 ‘최순우옛집’(성북로15길 9)이 손님들을 맞는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자였던 혜곡 최순우(1916~1984)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집필한 한옥이다. 맑은 바람에 감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는 뒷마당, 사랑방 문 위에 붙어 있는 ‘오수당’(午睡堂: 낮잠 자는 방)이라는 현판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씩 붙잡는다.
큰 길로 나서면 대리석과 나무 조형물로 남아 있는 ‘조지훈 집터’(성북동 142-1)를 볼 수 있다. <승무>, <낙화> 등의 시를 남긴 조지훈 시인(1920~1968)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들을 떠올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걸어서 10~15분 거리에 ‘상허 이태준 옛집’으로 알려진 ‘수연산방’(성북로26길 8)이 나타난다. “운문엔 정지용, 산문엔 이태준” 이라 했다. 문장가로 이름을 알린 작가의 시대와 행간을 읽고, 다시 언덕과 좁은 골목길을 따라 성실하게 오르면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옛집인 ‘심우장’(성북로29길 4)에 도착한다. 만해가 만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집이다. “집이 북향입니다.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가 보인다고, 아예 등지고 집을 지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만해의 고집과 지독했던 우리 민족들을 떠올려보세요.” ‘심우’(尋牛)는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선종의 수행에서 유래한 말이다. 제각각 성찰의 시간을 보내던 중 참가자 이현진 씨는 “서울에 40년 가까이 살았지만 성북동을 제대로 보긴 처음이다. 지켜야 할 유산이 많다”라고 말했다.

3 최순우옛집.

‘눈을 번쩍 뜨고’ 백석과 자야의 목소리를 찾다

이처럼 근대작가들의 흔적만 좇아도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난다. 구불구불한 옛 골목도 그대로 살아 있으니, 문학기행이란 척박한 일상에 문기를 끌어올려 촉촉한 바탕을 만드는 여행이자 작가의 혼을 부르는 의식처럼 여겨진다. 고(故) 김윤식 문학평론가는 문학기행 문집 <환각을 찾아서>에서 “‘문학기행’은 땅울림과 흡사한 ‘제4의 소리’를 찾아 듣는 일과 마찬가지”라며 “제4의 목소리란 내가 찾아낸 것이며 따라서 내 몫인 까닭입니다. 남이 창작해놓은 작품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고안해낸 장치가 내게 있어 문학 기행이기에 이는 나만의 영역이며 따라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제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에 대한 독려인지. 때 맞춰 성북동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북선잠박물관’(성북로 96)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인 어연경 명창이 소리를 뽑아낸 것. “얼씨구나 절씨구.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보니. 황설궁궐이 웬 일이며.” 절정에서 고수 조풍류 씨가 북채를 휘둘렀다. 박수가 쏟아졌다. 조선시대 ‘선잠단’(누에농사의 풍년을 비는 제단)이 자리했던 성북동에서 그 결을 이어받은 21세기 공간이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녹음에 묻힌 길상사는 백석과 자야의 젊은 날에 대한 얘기를 전했다. 권번 출신 여인이 시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죽는 날까지 가슴에 담았다. 1955년 요정 대원각을 인수한 자야는 1995년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보시했는데, 약 2만 3,140m2(7,000평)의 부지는 당시 시가가 1,000억 원에 달했다는 말도 있다. ‘그깟 1,000억 원,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는 여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목탁 소리 저편에서 들리는 듯하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멋쟁이 시인’은 염문도 많았다. “백석 시인은 평생 한 여인을 짝사랑하고, 기생과 동거도 하고, 결혼도 여러 번 했죠. 해방공간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처럼 ‘고향’과 ‘농촌’의 모습을 포착하거나 우리 문화를 시화하며 일제에 저항했던 작품 외에도, 여인과 사랑에 관한 시를 여럿 남겼습니다.”
‘남면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한 <편지>(1936)나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는 <통영-남행시초 2>(1936)처럼 말이다. 박미산 시인은 누하동에서 직접 운영하는 카페 ‘백석. 흰 당나귀’에 “얼마 전 문학탐사를 하는 정철훈이 <백석을 찾아서>를 내고 갑자기 찾아왔다”라며 “백석을 좇으며 가산을 다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실로 고마운 여정 아닌가”라며 반가운 일화도 전했다.
역사가 ‘내 목소리 내는 사람’의 편에 선다고 가정한다면, 자야는 역사를 제 것으로 만들 만큼 목소리가 뚜렷했던 듯하다. 그이가 <내 사랑 백석>에 빼곡히 기록한 시인 백석은 분명 자야를 ‘흰 당나귀’에 태웠을 남자다. 나타샤가 누구인들 어떤가. 갑갑한 일제강점기 시대에 근대 서울, 문장으로 서울을 견딘 문학인들과 그들의 말글살이를 오롯이 이해한 이들의 존재는 서로에게 축복처럼 보인다. 백석의 시 한 수를 세상 그 무엇보다 으뜸으로 쳤던 자야의 유언도 엉겁의 시간 동안 회자될 터였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주세요.”

4 수연산방.
5 성북선잠박물관 앞 무대에서 펼쳐진 어연경 명창의 공연.
6 길상사 자야 공덕비 앞에서 해설을 듣는 시민들.

작품 속 사연 따라 ‘서울문학기행’ 떠나볼까

지난 6월 12일에 시작해 오는 11월 30일까지 열리는 ‘서울문학기행’ 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서울 속 공간을 문학 전문가와 탐방하는 프로그램이다. 서정주, 윤동주, 김수영, 백석 시인의 흔적을 연달아 훑었고, 무더위를 피해 한 달 쉬었다가 8월 31일부터 5번째 기행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시작한다. 매회 참고 책자와 오디오가이드를 제공한다. 신청은 서울시 누리집(http://news.seoul.go.kr/culture)에서 회차별로 받는다.
글·사진 전유안_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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