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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우리, 모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처음, 사이코패스는 모성이 부족한 엄마 밑에서 태어나는 건지, 키워지는 건지에 대한 질문으로 영화를 읽었다. 하지만 두 번째 보고 나니 영화의 질문이 달리 보였다. 린 램지 감독은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것처럼 날 서고 차가운 칼날을 휘둘러 당연시되어온 모성의 신화를 폐부까지 난도질한다. 아이의 잘못을 부모는 얼마나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바탕에 깔았지만, 감독은 애초에 이기심이 모성애에 앞서는 주인공 에바를 절대 비난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과 싸움에 가까운 인내를 묵도하고 지켜보는 것으로 에바의 질문을 관객의 질문으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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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은 선천적인 것인가, 학습되는 것인가?

<케빈에 대하여>는 살얼음을 딛고 선 듯한 여성, 엄마가 된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온 에바는 임신을 한다. 영화는 만삭의 배를 바라보는 에바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는 엄마가 되는 것에 설레지 않는다. 태어난 케빈을 안고 기뻐하는 아빠 프랭클린과 달리 에바의 표정은 불행해 보인다. 한껏 자유롭던 내가 ‘엄마’로 바뀌는 10개월, 에바 같은 여성에게 그 시간은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짧게만 느껴진다. 그에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겹고 두렵다. 남편이 일을 하러 나간 사이, 육아는 온전히 에바의 몫이다. 프랭클린에게 안기면 천사처럼 얌전한 아이, 하지만 에바 앞에서는 종일 울기만 하는 케빈은 그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유모차를 공사장 앞에 세운 후, 평온한 표정을 짓는 에바의 모습이다. 공사장의 소음이 날카로운 아이의 울음을 지운 후에야 잠시 한숨을 돌리는 에바의 모습을 통해 육아라는 신경병적인 고통을 관객들과 공유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그는 서둘러 공사장을 떠나야 한다. 케빈이 클수록 에바에 대한 적개심도 커져간다. 말을 하지도 않고 기저귀를 떼지도 않는 케빈을 데리고 병원을 찾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듣자 에바는 더욱 절망스럽다. 어쩌면 그는 케빈에게 문제가 있다는 답을 얻고, 자신의 불행한 삶을 케빈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급기야 그는 케빈앞에서 “네가 태어나기 전이 더 행복했다”는 말을 한다.
둘째 딸 셀리아가 태어나면서 케빈과 에바 사이의 갈등은 그 꼬리를 감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욱 첨예해진다. 셀리아는 착하고 얌전해서 부모에게 행복을 주는 아이다. 케빈을 안았을 때의 불편한 표정과 달리, 셀리아를 안고 있는 에바는 행복해보인다. 그런 엄마의 변화를 바라보는 케빈의 마음에 상처가 났을 것 같다. 케빈을 대할 때 한없이 부족해 보이던 모성애가 셀리아를 대할 때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렇게 모성은 후천적 학습을 통해 에바에게 찾아왔을까? 영화의 또 다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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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엄마가 된다

이 영화는 모성애와 그 희생이 인간의 가장 숭고한 혹은 고귀한 것이라는, 모성을 강요받는 세상 모든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붉은색이다. 영화의 시작, 에바는 토마토 축제 속에 있다. 토마토가 터져 질척거리는 바닥이 피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자유분방한 에바의 과거가 죽어버린 현재, 그리고 케빈의 살육을 상징한다. 영화는 케빈을 낳으면서 엄마가된 에바의 과거, 끔찍한 살육을 저지른 케빈이 감옥에 간 이후, 세상의 비난을 묵묵히 감내하며 지옥의 한 철을 겪는 에바의 2년을 교차로 보여준다. 케빈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이웃사람들은 에바를 비난하고, 그의 집 앞에 붉은 페인트를 뿌려놓기도 한다. 그 붉은 페인트는 에바의 현재에 눌어붙은 죄의식이다. 에바는 묵묵히 페인트를 지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페인트를 지우는 과정은 피와 죄를 지우는 숭고한 의식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에바는 케빈에게 “왜?”라고 묻는다. 앞서 케빈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 에바는 케빈에게 한 번도 이유를 물은 적이 없다. 비로소 질문을 던지는 순간, 에바와 케빈은 서로를 마주하며 진심으로 안을 수 있게 된다. 에바는 케빈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며 그의 방을 만들어둔다. 에바는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을 현실로 체화하고서야 케빈을 받아들인다. 케빈이 자신에게서 나온 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에바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그렇게 엄마가 되려고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또 다른 질문과 마주한다. 프랭클린이 좋은 아빠처럼 보이는 것은 무책임하기 때문 아닐까? 케빈은 왜 가족을 다 죽이면서 증오하던 엄마만 살려뒀을까? 결국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나를 문질러 지워야 하는 걸까?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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