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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6월호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연극인 비상대책회의 2차 공개토론회국가자산 드라마센터, 그 행방을 묻는다

드라마센터는 지난 2009년부터 서울시에서 연간 약 10억 원, 총 100억 원의 임대료를 지급하고 ‘남산예술센터’로 사용해왔다. 올해 1월 서울예술대학교(이하 서울예대)가 임대계약 종료를 요청하자, 지난 3월 30일 향후 운영을 위한 현장 연극인 자문회의가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렸다. ‘언제까지 임대와 반환이라는 불안한 구조 속에서 극장을 운영해야 하는가, 공공극장의 안전성을 갖춰나가고 있는 남산예술센터의 지난 10년이 지워진 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긴급 사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역사 속에 묻힌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이라는 화두를 마주했다. 그동안 연극계에서 사유화 문제와 공공극장 얘기는 계속되었지만 온전하게 관철된 적은 없었다. 그 저변에는 남한 연극의 아버지 유치진과 그를 매개로 한 스승과 제자의 연결고리가 학계와 현장에 깊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2일 1차 토론회에 이어 열리는 2차 토론회는 드라마센터 사유화 논쟁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분석해 드라마센터 건립 당시의 사회적 합의를 재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_토론회 인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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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8년 5월 14일(월) 오후 7시
사회
김숙현 연극평론가
장소
남산예술센터(구 드라마센터)
발제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노이정 연극평론가
주최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연극인 비상대책회의
토론
이봉범 성균관대 초빙교수
이상우 고려대 국문과 교수

발제1예장동 8-19, 조선총독부 자리에 ‘누가’ ‘어떻게’ 들어왔나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드라마센터가 있는 ‘예장동 8-19’ 자리는 해방 후 국립과학관으로 쓰였다. 그전에는 일제의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있었고 조선총독부가 이전한 1926년부터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됐다. ‘예장동 8-19’ 토지대장을 보면 소유권에 ‘국’(國)이라고 적혀 있다. 소유권은 1978년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으로 이전되었다.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국유지에 극장 건물이 들어선 과정을 살펴보았다. 유치진은 극장 부지로 문교부 관할 국립과학관 자리를 주목했다. 당시 원조를 받기 위해 법인을 만들었다.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는 1958년 8월 설립되었고 설립 목적은 “민족연극 수립과 그 앙양을 위한 연구와 창조”였다. 약 1,000만 환을 출연했고 존속기간은 설립일로부터 30년이었다. 특이한 것은 법인이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와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 유지재단’(이하 유지재단) 2개라는 점이다. 유치진은 자서전에서 1958년 8월 유지재단을 설립했다고만 밝히고 있다. 유지재단의 목적은 “민족연극 수립과 그 앙양을 위한 연구와 찬조(원문. 창조의 오기)를 위하여 학교 소극장, 도서관 및 박물관을 유지 경영함”이다. 1963년에는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이하 학교법인)을 만든다. 유지재단은 국유재산대부 신청서를 제출하고,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관재국에서는 유상 임대해주기로 한다. 유상대부조서에는 문교부 국립과학관장으로부터 인수하고, 문교부 장관이 특별 지시했다는 내용이 있다. 국유재산은 용도에 따라 행정재산과 보통재산, 보통재산은 보존재산과 잡종재산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잡종재산만 처분할 수 있다. 국립과학관은 행정재산이었지만 재무부로 관리 권한을 변경해 민간에 불하할 수 있도록 했다. 재정법 시행령에 따라 공익법인과 수의계약을 체결하고 1년간 땅을 빌려주기로 한다. 유치진은 1960년 8월 대부승인 요청서를 발송했으나, 1960년 9월 문서에는 유치진에게 이 땅을 매각하라고 나와 있다. 이에 따라 매매계약서가 체결되는데 계약 총액은 6,000만 환이었다. 유치진은 돈을 내지 않다가 10년 또는 15년으로 상환하게 해달라는 분납 청원서를 제출한다. 이후 1961년 박정희가 집권하자 국유재산 무상대부 신청으로 변경한다. 이와 별도로 1960년 10월 극장 건립을 시작한다. 당시 건축비 융자 과정에서 특혜도 있었다. 초점은 유치진이 어느 시점에 공공성, 민족, 국가, 한국 연극을 이야기하고 있는가이다. 결국 토지매각 대금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1961년 12월 준공, 1962년 4월 개관했으나 1년도 안 된 1963년 1월 폐관한다. 1963년 12월 당시 재단 이사였던 공보부 장관은 재무부 장관에 대금 납부기간 연기를 의뢰한다. 드라마센터는 1963년 11월 유지재단 이사회 결의로 1964년 2월 설립된 학교법인으로 넘어간다. 토지대금은 납부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1970년에서야 완납한다.
드라마센터는 당시 국가가 탈법을 저지르면서 편의를 봐주고 혜택을 준 과거를 안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비리와 적폐이다. 조선총독부 땅이었지만 여기에서 한국 연극의 역사가 진행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학교 측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와 시민이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토론1

이봉범 성균관대 초빙교수

이봉범

성균관대 초빙교수

토지대장에는 인간의 욕망이 얼룩져 있다. 땅은 말이 없지만 ‘예장동 8-19’ 토지대장은 말하고 있다. 넓게 보면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을 웅변해준다. 식민권력, 냉전권력, 비민주적 독재권력, 개인의 욕망이 착종되어 있는 우리의 아프고 소중한 역사이다. 여전히 법적으로는 서울예대의 소유이다. 공공성은 분석과 해석의 차이이다. 그 간극에서 공공성의 사회적 이슈화에 대한 많은 고민과 작업이 필요하다. 해방 후 냉전의 문화자본 차원에서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부터 원조경제의 시대라고 하는데, 다른 차원에서는 원조문화와 학술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미 국무성이나 ICA와 같은 공적자본뿐 아니라 포드재단, 카네기재단, 록펠러재단과 같은 미국의 주요 민간 재단이 한국의 문화예술에 집중적으로 원조했다. 드라마센터는 록펠러재단이 주가 되고 아시아재단을 경유하고 한미재단도 결부되었다. 동시대 다른 사례와 비교해보면 1956년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사회과학연구도서관이 발족한다. 한국연구원으로 개칭해 지금까지 4개 대학 총장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통해 엄격하게 운영된다. 최근 재개발로 건물이 철거되면서 보상받은 돈은 다시 인문학에 지원한다. 포드재단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 1962년부터 1975년까지 110만 달러를 지원했다. 냉전의 문화자본에서 공공성이 잘 발휘된 예이다. 어찌 보면 드라마센터가 냉전의 문화자본 가운데 공공성을 훼손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냉전권력과 독재권력의 결부는 유치진과 드라마센터의 존재 방식과 연관이 많다. 1954년 사상전의 총동원 체제를 가동하면서 문화예술에도 광풍이 몰아친다. 친일이라는 민족 문제가 희석되면서 친공이라는 이념 문제로 전치된다. 1955년 사상 검증을 시도하고,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 1958년에는 이광수와 최남선을 복권한다. 친일파가 합법적으로 복권되고 냉전의 문화자본이 한국에 작동하면서 소위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했다. 그중 한 명이 유치진이다. 유치진은 록펠러재단의 중요한 한국 에이전시가 되고 개인적으로도 지원을 받는다.
드라마센터가 이상한 방식으로 사유화되는 흐름에서 5·16 직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 민간재단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는다. 포드재단이 고대 연구소를 지원할 때 전제조건은 박정희 정부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드라마센터는 중앙정보부가 허가했고 김종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61년 정부조직법 개편으로 공보부의 권한이 강조된다. 공보부의 첫 번째 목표는 대내외적 심리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가장 중시한 미디어가 방송이고 영화, 연극이 그다음이다. 심증이지만 박정희 정부와 유치진의 결탁은 심리전을 중심으로 한 냉전정책과 결부돼 있다. 부정적 측면에서도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을 얘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법해석이 학교 측에 먹힐지, 어느 정도 법적 설득력이 있는지 궁금하다.

발제2한국 연극 권력의 탄생 - 유치진 일가의 드라마센터 사유화 과정

노이정 연극평론가

노이정

연극평론가

드라마센터 설립 후 서울예대에 귀속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발표하겠다. 먼저 드라마센터 건립 과정의 신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연극계에서 유치진과 드라마센터는 신화의 영역이었고 객관적인 연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구술 자료, 유치진 자신의 기록에만 의존해왔다. 이제는 누군가 쌓아올린 신화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를 들여다보는 시선으로 드라마센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현실화해야 할 시점이다. 공공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드라마센터 건립 과정의 서사가 필요하다. 지난 10년간 계약 형식이기는 하나 서울예대에서 독립해 공공의 관점으로 재영토화한 남산예술센터는 연극인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었다. 개인의 이익을 내세워 다시 극장을 독점하겠다는 서울예대의 요구는 공공의 자산을 또다시 잃게 된다는 상실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이 극장의 공공성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드라마센터의 숨은 역사에 대한 질문은 4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록펠러재단이 지원한 5만 5,000달러에 적용된 환율의 진실 문제이다. 1차 토론회에서 당시 유치진이 유리한 환율을 적용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드라마센터 건립비용 15만 달러 중 절반 이상을 미국 재단에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이후 원래 200석가량의 실험소극장을 계획했다가 500석 규모의 중극장으로 확대하면서 한국 연극의 오랜 염원이던 소극장 동참 요구를 외면한다. 두 번째, 드라마센터는 1962년 4월 개관하고 유치진은 1963년 11월 학교법인 인가를 신청한다. 극장은 학교법인 설립을 위한 기본재산이자 학교 유지를 위한 수익 창출의 장이 된다. 유지재단은 드라마센터 기증을 위해 이례적으로 1963년 10월 10일과 11월 3일에 두 차례 이사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건물만 기부하고 대지는 국유지로 10년 분할 상환 중이므로 학교법인이 불입하게 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기증을 위해 드라마센터 건물이 유지재단의 기본재산이 아니라는 공증을 받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세 번째, 드라마센터와 유지재단, 학교법인에서 유치진의 측근을 제외한 동시대 연극인들을 점점 더 배제했다. 유지재단 이사진은 1958년 7인 중 3인 이상이 연극인이었지만, 학교법인에는 유치진의 최측근인 이흥근만 남았다. 드라마센터의 연극사적인 중요성은 이사진 구성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대학이라는 사학 건립 서사로 변한다. 학교법인 이사진 구성에는 유치진 일가의 사적 인연이 두드러졌다. 네 번째, 극장 건물은 학교법인 재산이 되었지만 유지재단은 한국 연극 부흥의 명목으로 금전적 특혜를 정부에 계속 요구했으며 이는 문화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관철되었다. 1960년 9월 28일 국유재산 매매계약 체결 당시 계약대금 1개월 내 완납이 조건이었지만, 1960년 11월에는 5년, 1962년 1월에는 10년으로 바뀐다. 이후 대금 체납으로 인한 압류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나 장관들의 협조 의뢰 공문을 받았다. 대금은 1970년 9월 14일 완납한 것으로 1973년 기록에 남아 있다. 이때까지 대지는 유지재단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법인에 기증할 수 없었다. 1973년 유지재단 이사회를 통해 대지도 학교법인 소유가 되었으며 실질적 등기 이전은 1978년 이뤄졌다. 드라마센터 건립과 건립 이후의 관리, 운영, 소유의 문제는 56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규명되지 않고 논란의 중심에 있다. 현재 드라마센터는 서울예대와 서울시 사이에서 제대로 보수되지 못해 건물 자체의 안전 문제도 대두될 수 있는 상황이다.

토론2

이상우 고려대 국문과 교수

이상우

고려대 국문과 교수

발제에서 가장 공감한 부분은 드라마센터 사유화 과정에서 나타난 신화적 서사의 해체를 주장한 점이다. 1962년 드라마센터 설립은 1935년 동양극장 이후 두 번째 연극전용극장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 의미가 있다. 이는 록펠러재단이 제공한 종잣돈, 유치진의 헌신과 열정, 국가가 제공한 각종 특혜, 연극계를 비롯한 범사회적 지지와 후원이 한데 모여 이뤄진 결실이라 생각한다. 록펠러재단과 유치진의 유착 관계에는 맥락이 있다. 유치진이 1930년대부터 30년 동안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해방 직후 좌우 대립 상황에서 우익 연극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점, 1950년 설립된 국립극장 초대 극장장이었다는 점, 1950년대 연극계를 주도했던 극단 신협을 이끌었다는 점 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드라마센터 설립 과정에서 록펠러재단과 유치진 개인의 집요하고 열정적인 헌신과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서사가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유치진의 측근 연극인, 제자, 서울예대를 중심으로 희생 서사와 신화가 확산된 것이다. 신화적 서사가 드라마센터의 사유화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도구로 악용된 것도 사실이다.
먼저 드라마센터의 역사적 진실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드라마센터는 연극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향유해야 하는 공공극장이다. 동시에 역사·문화적 의미를 띤 한국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공공건축물이다. 드라마센터가 특정 사학을 위한 교육시설로 되돌아간다면 앞으로도 암담한 세월이 지속될 것이다. 다음으로 드라마센터의 사회 환원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이 있어야 한다.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방법은 정부나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서울예대와 대타협을 통해 공공극장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보상이 있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법적 소유권 문제가 있고, 서울시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공공극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서울예대에서 거부한 전례도 있다. 유치진 유족, 서울예대가 드라마센터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역사성이 있는 드라마센터라는 극장 이름도 보존할 수 있다. 건립 과정에서의 유치진의 기여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도 필요하다. 대타협을 통해 드라마센터를 사회에 환원하고 남산예술센터와 같은 방식의 공공극장으로 지속 성장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다.

‘공공극장’의 사회 환원을 요구한다

김숙현 연극평론가

김숙현

연극평론가

김숙현공공재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발제와 토론 내용에 대한 질문도 좋고 정상화 방안을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남윤수(작가)개인적으로 드라마센터 사유화 과정이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우연히 이루어진 결과인지 의문입니다. 당시 유치진의 극장 사유화 문제가 불거져 록펠러재단이 지원을 중간에 끊어버린 사례도 있고요. 재단법인에서 학교법인으로 기부한 과정을 그 당시 연극인들이 알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드라마센터가 1년도 안 되어 문을 닫고 학교법인 설립을 준비했는데 이 부분도 미리 계획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당시 원조가 많았다는데 다른 공공재 사례에서는 어떤 식으로 법인을 구성하고 사업을 진행했는지 비교·분석하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정진수(연출가)제 생각에는 3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법적 대응입니다. 법적으로 허점이 많아 되찾아올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상대책회의에서 전문가와 법률적인 검토를 해보았는지 되묻고 싶고요. 승산이 있다면 법적 분쟁을 통해 되찾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죠. 두 번째는 서울예대와 타협을 통해 공공극장으로 완전히 되찾는 방법과 사용권을 사이좋게 분할하는 방법입니다. 학생 발표회 장소 활용이 명분이라면 봄학기와 가을학기에 1년에 2달 정도 사용하게 하고 나머지는 공공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따른 보상은 서울시, 지원기관과 협의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고요. 세 번째 방법은 극단적입니다. 1991년 유사한 사태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건설이 소유하고 있는 동양극장을 폐쇄하겠다고 하자 연극인 500명이 결집해 최초로 가두시위를 벌였죠. 연극인들이 항의시위를 할 것 같다는 보도가 나가자 현대건설은 하룻밤 사이 동양극장을 철거해버렸어요. 이대담때 연극인들이 폐허가 된 터에 모여 지신밟기를 하면서 시위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연극인들이 서울예대로 몰려가 시위를 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방법은 아니고요. 서울예대와의 타협 가능성에 대해 정중헌 전 부총장의 의견을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정중헌(전 서울예대 부총장)지금은 퇴직했지만 2009년부터 3년간 부총장으로 있었습니다. 2007년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드라마센터를 어떻게 할지가 가장 큰 당면과제였습니다. 드라마센터는 학교법인 동랑예술원 소속입니다. 법인 소속의 건물에서는 어떤 교육도 할 수 없습니다. 사립학교법상 재단이 소유한 재산은 이익을 창출해 학교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드라마센터를 예식장으로도 쓰고 미8군 쇼도 열어보았지만 채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특히 2001년 안산으로 캠퍼스를 이전한 후에는 활용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공연을 올릴 만한 예산과 인력을 갖춘 극단도 흔치 않습니다. 제 판단은 서울시에 대관하는 것이었습니다. 2009년 서울시와 동랑예술원이 계약을 맺고 3년 단위로 갱신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남산예술센터라는 이름을 병행하면서 잘 운영해왔습니다. 서울시와 학교가 좀 더 논의해서 공공극장으로 운영하는 것이 연극인들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요? 연극인들이 드라마센터의 존재에 대해 학술적, 이론적으로 확실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엇이 정상화일까요? 서울시에서 관리·운영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계약 중단을 확대 해석하기보다는 서울문화재단이 계속 운영해서 연극인들이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공공기관에 맡겨서 연극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극장을 짓긴 했지만 연극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드라마센터를 사유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학교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가 전무했던 시절에 자연 발생적으로 학교가 태동했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김숙현학교와 서울시가 언제까지 임대계약을 반복해야 할까요? 드라마센터는 공공자산이고 범 연극계의 힘이 결집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법적 투쟁으로 대응해서 되찾아올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시현 선생님이 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시현국가기록원 자료를 검토하면서 법적 쟁점을 같이 엮어보려고 합니다. 쟁점은 조선총독부의 땅이라는 겁니다. 일제의 재산이었다는 측면에서 귀속재산 문제가 있는데 정부는 1960년대에 아무런 역사성이 없는 일반 국유재산으로 업무를 진행했죠. ‘귀속재산처리법’(법률 제8852호)이 1949년 제정되었는데 지금까지 유효합니다. 제2장 제5조에 보면 “귀속재산 중 대한민국헌법 제85조에 열거된 천연자원에 관한 권리 및 영림재산으로 필요한 임야, 역사적 가치 있는 토지, 건물, 기념품, 미술품, 문적 기타 공공성을 유하거나 영구히 보존함을 요하는 부동산과 동산은 국유 또는 공유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장동 일대의 땅의 역사성을 다시 조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국유재산법하의 법적 쟁점도 정리하고 세밀하게 검토해서 법률자문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는 활동 기간이 30년이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지재단은 지금도 등기부에 나옵니다. 이사진은 1962년에 임명되어 한 명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유령재단인 거죠. 유지재단은 드라마센터와 땅을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에 넘겨주고 임무가 종료된 것입니다. 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이라면 법인이 해산되어야 합니다. 해산할 경우 기본재산은 국유로 가거나 유사한 목적이 있는 곳에 기부해야 합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이사회에서 증여, 기부 논리를 만든 것이죠. 이사회가 열린 1963년에는 국가 땅이었습니다. 완납을 한 1970년에 비로소 학교 측이 소유자 행세를 할 수 있었죠. 자기 손에 없는 것을 증여한 것은 무효입니다.
강훈구(작가·연출가)다른 맥락으로 남산예술센터가 공공극장으로 기능한 지난 10년 동안 연극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연극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기능했는지, 전과 후가 달라진 부분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를 통해 연극인들이 자신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극장을 다시 한 번 발견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이 논란이 이 극장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심재찬(연출가·전 대구문화재단 대표이사)우리는 이 기회에 공공극장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랑예술원에서도 공공재로서의 극장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교법인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법적 분쟁으로 가는 사태가 올 텐데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거든요. 서울예대에서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 먼저고, 그다음 서울시나 정부가 학교 측과 상의해서 운영해야 합니다. 학교 측과 얘기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비상대책회의에서 구체적으로 향후 단계를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이정드라마센터에는 유치진의 정신과 열정이 깃들어 있지만, 드라마센터 건립으로 유치진 가계와 학교법인은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드라마센터는 최근 10년 동안 학교법인의 수익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예대에서 직접 운영해도 수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유덕형 총장은 ‘유치진극장’으로 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는데요. 이름이 들어가려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사회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재산 소유주가 이름을 붙이는 건 맞지 않습니다. 자료를 검토하면서 서울예대에서 극장을 아름답게 사회에 기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권병길(연극배우)저는 50년 동안 연극배우를 하면서 이 극장에서 정말 공연해보고 싶었습니다. ‘왜 이렇게 활용을 못할까, 이 멋진 극장에서 우리는 왜 연극을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극장이 사유화되고 이익을 생각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숙현드라마센터가 한 개인과 일가의 것일 수는 없습니다. 1958년 첫 삽을 뜰 때의 생각은 사유화가 아니었다고 확신합니다. 많은 연극인들이 이 공간 안에서 함께 공연하고 좋은 연극을 만들어서 이 땅의 연극을 진일보시키고 세계 연극의 수준을 올리자는 이상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진 선생님을 믿고 싶습니다. 이 극장은 공공극장입니다. 사회에 환원되는 날이 올 때까지 관심을 멈추지 않고 함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리 전민정 객원 편집위원
사진 최성열

※ 토론 내용은 서울문화재단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니며 [문화+서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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