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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8월호

2017년의 여름 우리 안이 더 뜨거워
작년에 무슨 일 때문에 창원에 내려갔다. 태어나 처음 가본 곳이고, 그 근처인 부산에 가본 지도 20년 가까이 됐다. 새벽 KTX로 창원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서 일행을 만나 아침을 먹기 위해 승용차를 탔다. 길가에 못 보던 가로수들이 보였다. 못 보던 가로수라기보다는 그 전해 미국 라스베이거스 인근에서 봤던 가로수와 비슷한 가로수들이었다. 한 20년 전쯤에 제주도 공항에서 본 나무들과 상당히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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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놀란 사람처럼 창밖을 가리키며 어떻게 창원은 가로수가 야자수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야자수를 보려면 열대의 나라에 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지금도 백과사전을 검색해보면 야자수는 “동남아와 남태평양 제도에 분포한다”고 나온다. 그만큼 창원의 기후가, 여름은 후덥지근하고 겨울도 따뜻해졌다는 얘기다. 서울도 머지않았다.
기후가 이렇게 됐다고 마냥 피할 수는 없다. 여름이 못 견디겠어서 알래스카로 떠난 SNS 친구가 둘이나 된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돌아와 남은 여름을 견뎌야 한다. 서울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 여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태양을 피하는 방법

다행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어 인공적으로 태양을 없애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영화관, 극장, 콘서트 홀, 미술관은 아무리 기세 좋은 태양이라도 쫓아 들어올 수 없는 공간들이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그 파괴의 결과를 피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해냈다. 나도 여름에는 지레 포기하고 휴가를 가지 않는 사람이니, 서울에서 여름을 견딜 때 영화관이나 미술관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다.
이 글을 쓰다가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 그 친구는 땡처리 호텔을 잡아볼 것을 권했다. 여름에는 다들 서울을 떠나니, 서울의 5성급 호텔들이 싼값에 나오곤 한다는 것이다. 호텔에 수영장이 딸려 있는 경우도 있으니, 호텔 밥도 먹으면서 휴가를 시원하게 보낼 수 있다.
괜찮은 방법이다. 호텔에만 머무르면 휴가 기간 내내 햇볕 한 번 안 쬘 수 있고, 땀 한 방울 안 흘릴 수 있다. 집에 있다면,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놓는다고 해도 장을 보러 한 번은 외출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라도 나갈 일이 생긴다.
호텔이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올해도 미술관을 활용하고 있다. 미술관은 동남아 열대를 닮아가는 서울의 기후에 아주 아늑한 쉼터를 제공한다. 여름엔 냉방이, 겨울엔 난방이 잘되어 있고 공기는 늘 산뜻하며 조용하기는 도서관 못지않다. 미술관에 가봤다면 알 것이다. 미술관은 더위, 추위, 황사와 미세먼지, 도시 소음으로부터 잘 보호된, 도심 속의 청량한 섬처럼 존재한다. 서울에서 사시사철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공간이 미술관이다. 영화관처럼 간혹 악취가 나거나 너무 어둡거나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고, 사람이 지나치게 몰리지도 않는다. 콘서트 홀처럼 귀청을 찢는 소음도 없다.
미술관 관람에 익숙하지 않다면 유행에 뒤진 것일 수 있다.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에 들렀던 한 미술관은 적지 않은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로 넘쳤다. 그것도 대부분은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해, 예술향유의 습관을 들이고 돈을 쓰기 시작한 젊은이들이었다. 영화로 치면 전시 규모 자체도 블록버스터 급이고, 흥행도 블록버스터 급이었다. 당연히 전시 환경도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전시회를 보며 느꼈던 건, 이제 미술 전시도 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고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웬만큼 이름난 외화를 수입해 상영하는 것보다도 제대로 된 기획의 미술전시 한 편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도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도 미술관 관람에 재미를 들일 필요가 있다.

지난해, 속을 까맣게 태운 열불도 견뎌냈으니…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여름이다. 어제는 장을 보러 나갔다가 채 100m도 걷지 않았는데 얼굴이 화끈화끈 익어버렸다. 이 정도로 센 태양광선은 카리브해의 쿠바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미술관이 아무리 좋아도 미술관에 가는 도중에 이런 햇볕 아래를 걷다 보면 기운이 빠지고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 미술관이 제아무리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도 이런 날씨에서는 불쾌해질 수 있다. 승용차에서 내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동안에도 여름은 사람에게서 고상함을 빼앗아버리고, 미친 듯한 짜증과 불쾌감만 남겨놓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 한국인은 ‘열불이 난다’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화가 많은 사람들이다. 작년만 돌이켜봐도 열불이 나서 속을 까맣게 태워버릴 만한 일들이 숱하다. 그런 사람들이니 이런 동남아 기후도 큰 탈 없이 잘 견딜 것이다. 종종 태양보다 속이 더 뜨거운 사람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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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민석_ 소설가. 작품으로 단편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공포의 세기>, 미술 에세이 <리플릿> 등이 있다.
그림 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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