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5층에 있습니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거의 이용하지 않습니다. 전기를 아끼는 게 아니라 제 몸을 아끼는 게 목적입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자신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난 아직 걸을 수 있어.’ 난 건강해. 지금 운동 중이거든.’ 계단에서 만나는 직원에게 아침 인사를 건넵니다. “오늘 기분 어때요?” 돌아오는 답은 예측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만약 그 직원이 ‘글쎄요’라고 답하면 제 기분이 어떨까요? 그래서 분이 참 고맙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즐겁게 열어준 직원에게 저는 미소를 선물합니다.
가끔은 가방에서 저의 비상식량인 초콜릿을 꺼내주기도 합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오늘의 뉴스와 일과를 살핀 후 층별 나들이에 나섭니다. 요즘은 3층 나들이가 특별히 즐겁습니다. 입구에 자리한 생활문화사업팀에 들어가면 삶은 달걀이 매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직원들과 달걀을 까먹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를 들려줬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받고 ‘삶은 달걀과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우리 세대에겐 나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기차를 타면 반드시 듣게 되는 친숙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오징어, 사이다, 땅콩, 삶은 계란.” 추기경 님은 거기서 힌트를 얻으신 겁니다. “누군가에 의해 깨진 달걀은 프라이가 되고 스스로 깨고 나온 달걀은 병아리가 된다.”
교육용(?) 아재 개그도 하나 덧붙였습니다. “평창올림픽에 침투한 노로바이러스가 회사에도 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모두가 의아해할 때 직장 내 노로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힙니다. “노로는 노예와 로봇을 줄인 말입니다. 일의 노예, 감정 없이 노동만 하는 로봇은 절대로 되지 맙시다.” 간식도 먹고 강의도 들은 직원들에겐 아마도 담임선생님의 조회시간 같았을 겁니다.
재단에 생활문화지원단이 생긴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생활예술, 생활체육, 생활경제, 생활디자인, 생활영어, 생활지원센터, 일상생활, 전원생활, 기초생활 등 생활이 들어간 말이 수없이 많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생활기록부라는 단어에 애틋함을 느낍니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을 보내지만 스스로 문서에 기록을 남기는 일은 드뭅니다. 그런데 어떤 관찰자가 나의 소년 시절을 대신 기록해두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그 관찰자는 바로 담임선생님입니다.
학교에서 지금도 생활기록부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지식백과를 들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는 겁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학생의 학교생활 모습과 발달상황을 기록하여 50년간 보존하는 문서.’ 제가 왜 놀랐는지 그 이유를 들으시면 아마 이번엔 독자가 놀랄 겁니다. 올해가 바로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담임선생님의 객관적, 아니 주관적 시선으로 기록한 저의 어린 시절이 지금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겁니다. 빠른 시일 안에 제가 졸업한 돈암초등학교를 방문해야겠습니다.
발걸음을 안으로 옮깁니다. 3층 중앙에는 축제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영사모’ 회원들이 있습니다.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우리 재단에는 직원과 대표가 비공식적으로 어울리는 모임이 많 습니다. 4인용식탁, 월요문화카페, 꽃보다 문화에 이어서 최근엔 영사모가 결성되었습니다. 영사모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이자 영호를 사랑하는 모임입니다. 재단에는 두 명의 영호가 있습니다.
감사실의 중년영호(김영호)는 50대, 축제팀의 청년영호(오영호)는 30대입니다. 영사모 소속의 영호는 청년영호입니다. 오영호는 재단에서 제가 맨 처음 얼굴을 마주한 직원입니다. 직 접 재단을 방문하여 대표이사 공모 지원서를 제출할 때 접수 담 당 직원이었습니다. 첫인상은 무덤덤했습니다. 친절한 것도 아니 고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재단에 첫 출근한 날부터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사근사근’하진 않았지만 맡은 일은 ‘차 근차근’ 잘하는 직원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인연 하나 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바로 내가 다닌 돈암초등학교 31년 후배 였던 겁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취향의 접점을 찾아냈습니다. 영화 보기를 즐긴다는 점이 일치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영화 감상을 하고 영화 평을 나누는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의기투합이 이루어 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와 영호가 주축이 되 고 그때그때마다 멤버들을 영입하는 형식에 합의했습니다. 맛있 는 식사가 뒤따르는 건 재단의 미풍양속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 영화로 <코코>를 선정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 화는 제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찾아본 포스터의 글귀가 자꾸만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영원히 기억하고싶은 사람이 있나요?”
<코코>의 동행자로 캐스팅된 축제팀의 김영규, 김유리와 함께 명 동에서 만두를 먹고 커피를 마신 후 저희 넷은 드디어 극장에 들 어섰습니다. 15분가량 <겨울왕국>의 별책부록이 펼쳐진 후 드디 어 <코코>의 세상으로 진입했습니다. 멕시코가 배경인 화면의 빛 깔은 강렬했고 죽은 자들의 꽃으로 묘사된 금잔화는 화려했습니 다. 등장하는 캐릭터는 저마다 개성이 분명했습니다. 코코를 포 함한 할머니들은 무척이나 귀여웠습니다. 귀여운 노인이 되는 게 꿈인 저에겐 적잖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적절한 비율로 등장하는 것도 좋았습니 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주인공 소년의 증조할머니 코코가 소녀처럼 눈물 흘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앞에서 우리는 다시 소년소녀가 된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영화에서 죽은 자들의 날은 길어야 3일입니다. 그들이 이승을 방 문하려면 산 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기억이 사라 지면 부활은 없습니다. 마지막 음악
“산 자들의 날은 365일이야. 살아 있는 동안 사이좋게 지내자.”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