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종은 노래 속의 종입니다. 광화문 부근에 10년 넘게 살지만 아직도 산책 중에 새로운 것들이 종종 시야에 잡힙니다. 얼마 전엔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노래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주변을 숱하게 걸었지만 바로 옆 세종로공원에 이런 비석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연보를 찾아보니 2009년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 <광화문연가> 노래비가 세워지기 14년 전인 1995년부터 세종로 한구석엔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세워져있던 겁니다.
<서울의 찬가>는 길옥윤이 작사·작곡하고 가수 패티김이 불렀습니다. 대중가요사를 풍미한 이름들입니다. 1969년 음반에 처음 실렸고 이후 각종 행사장에서 숱하게 불렸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는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야구단 응원가로도 살짝 등장합니다.
노래가 발표될 당시 두 사람은 사이좋은 부부였습니다. 결혼 7년 만에 둘은 이별하는데 ‘낭만부부’답게 헤어지기 직전 <이별>이라는 노래를 크게 히트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스토리가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어질 거라 예측합니다. 만남과 이별도 그렇지만 마지막 해후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입니다. 길옥윤 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던 패티김은 전 남편의 영결식장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로 시작하는 <이별>이 상식적(?)인 선곡일 듯싶은데 뜻밖에도 패티김은 <서울의 찬가>를 불러서 문상객들을 살짝 놀라게 했습니다. 원곡은 밝은 행진곡풍인데 그날은 진혼곡으로 불렀던 겁니다. 확장성이 넓은 노래인 게 분명합니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노랫말에 그려진 서울은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갑자기 <그것이 알고 싶다>로 전환?) 시청 앞의 꽃들은 여전히 활짝 피고 새들(주로 비둘기들)도 광장을 누비지만 종소리를 들어본 기억은 가물가물합니다. 고작 들을 수 있는 건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 정도입니다. 한 해에 한번 몰아서(33번) 듣는 종소리를 통해 시민들은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 하고 체감합니다.
이제 두 번째 종이 나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선 종소리가 자주 들렸습니다. 수업의 시작과 끝에도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입학해서 가장 먼저 배운 노래도 <학교종이 땡땡땡>입니다. 그 가사도 옮겨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제는 종소리도 들리지 않고 선생님도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매일매일 모입니다. 산에서? 지하철에서?
당구장에서? 아닙니다. 지금 친구들을 모이게 하는 소리는 학교종이 아니라 채팅방 새소리(까톡 까톡)입니다. 우정의 매개자인이 새는 기특하게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갖 엽서를 배달하는데 며칠 전엔 특이한 물건 하나를 물어왔습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눈여겨보니 피사체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을 위해 처음 만들어진 히트상품입니다. 이태리타월! 정작 이태리 사람은 모르는(알아도 사용할 것 같지 않은) 한국인 전용 ‘때 미는 수건’입니다. 목욕탕 갈 때 필수품이었던 추억의 타월 한 장으로 수선을 떠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위에 써진 다섯 글자 때문입니다.
“다 때가 있다.”
그냥 읽고 넘어가기엔 가슴 한쪽에 여운이 남습니다. 때 미는 수건 위에 이런 말을 띄울 정도의 예지력을 갖춘 그 분은 누구일까요. 문득 이 사진을 확대하여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광화문네거리 ‘글판’에다 올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우리 몸에도 때(垢)가 있고 우리 삶에도 때(時)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때는 찾아오고 어떤 이에게 때는 그냥 지나갑니다. 만남의 때가 있고 이별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묵은 때는 있는 법입니다. 자신의 때는 숨기고 남의 때만 탓하는 세태를 이태리타월이 ‘땡땡땡’ 꾸짖는 듯합니다. 여기서 울리는 종의 이름은 경종(警鐘)이 적당하지 않을까요? 경종은 지금도 울리는데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허겁지겁 앞만 보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제 마지막 종을 울릴 차례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조종(弔鐘)입니다. 여기서 종은 죽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이것은 결국 ‘누구를 위하여 죽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인간에게는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사는 기간은 불투명해도 죽음의 시간이 오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희망보다 욕망에 목을 맵니다. 다 때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