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더다이즘, 열세 번째 파리로 가는 길 나에게로 가는 길
10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에는 미술관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박물관도 있습니다.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지냅니다. 바쁜 걸음으로 그냥 지나칩니다. 허둥지둥 살다가 어느 날 건물 앞에 걸린 그림 하나에 눈길이 머뭅니다. 가던 발길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그것으로 인해 마음도 움직입니다. “아, 저 화가의 그림은 직접 가서 봐야지.” “저 전시물들은 사진으로 찍어 보관해야지.”
관심이 없으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오는지 가는지도 모릅니다. 가을이 왔는데도 가을에 관심을 주지 않으면 가을은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서운한 가을이 말을 한다면 ‘참 무정한 사람이로군’이라고 한 마디 던질 겁니다. 그래도 온유한 가을은 또 올 겁니다.
주변엔 계절을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슬며시 SNS에 나타나 말을 겁니다. 시를 적어 보내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저에게 ‘가을이 왔어. 그래도 나는 너를 잊지 않아’라고 속삭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립니다.
2010년에 서울대에서 ‘방송분석’이라는 수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강원도 고성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고성에 소설가 김하인 씨가 사는데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제목(<국화꽃 향기>)으로 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번 들르겠다고 지나가듯 말한 약속이 느지막하게 이루어진 겁니다. (참고로 그는 제가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할 때 사제의 연으로 만났습니다.)
고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학생들에게 여행의 기대감을 몇 개의 단어들로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늘 앞자리에 앉는 국문과 복학생 조영민 군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 여행을 마치고 학생들이 사진첩을 제게 선물했는데 그 작은 앨범 표지에도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혼식 때 제가 주례를 선 조영민 군은 졸업 후에 드라마 PD가 되었습니다. 그가 연출하는 드라마 기획안 어딘가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비유하자면 <파리로 가는 길>은 예고 없이 받은 가을 보너스 같은 영화입니다. 포스터가 마음을 끌어당기긴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바쁘다는 이유였죠. 그러다가 ‘뜻밖의 사람들’로부터 ‘마음이 움직이는 시간’을 선물받게 되었습니다. 초대권을 상상하시나요? 아닙니다.
먼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재단의 대표로서 1년에 몇 번은 서울시의회에 가야 할 일이 생깁니다. 물론 자발적인 방문은 아닙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준비를 아무리 해도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현기증 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한 ‘뜻밖의 사람들’은 바로 시의원들입니다.)
그날도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시의회에 출석했습니다. 평상시엔 아무리 일찍 끝나도 저녁시간까지는 머물러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사회를 맡은 의장이 평소 열변을 토하기로 유명한 몇몇 의원들에게 미리 당부를 하는겁니다. “오늘은 조금 짧게 부탁드립니다.” 솔깃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오후 4시쯤 질의응답이 모두 끝났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영화관을 향해 가는 길은 가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제가 선택한 <파리로 가는 길>은 그리 가벼운 여정은 아니었습니다.
80세가 넘은 여성감독(엘레노어 코폴라, 1936년생)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뭐가 그렇게 바쁜가?’ 영화제작자인 ‘마이클’(알렉 볼드윈)과 ‘앤’(다이안 레인)은 ‘바쁘게’ 사는 부부입니다. 칸에서 만난 ‘자크’(아르노 비야르)는 마이클과 사업 파트너이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그는 수없이 묻는 앤의 질문 “파리, 오늘은 갈 수 있나요?”에 느긋하게 답변합니다. “걱정 말아요. 파리는 도망 안 가요.” 영화의 원제목도 <Paris Can Wait>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두를까요? 왜 이렇게 바쁜 삶을 살까요? 90일이나 기다려주는 가을에게 왜 눈길 한 번 안 주는 걸까요? 영화를 보면서 뜻밖에도 미스터리 스릴러 <곡성>이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 ‘뭣이 중헌디?’와 <파리로 가는 길>이 던지는 메시지가 비슷하다고 느낀 겁니다.
가을은 가지만, 아니 갈 터이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을은 또 오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은 다 살아있는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언젠가 우리에겐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늘 기다려줄 줄 알았던 가을과는 그렇듯 덧없이 이별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갑니다. 그러나 성공을 마지막 목적지로 설정하면 평생 몇 번 성공 못합니다. 작은 일에서 찾는 소소한 기쁨, 이를테면 파리로 가는 길에 만난 정원, 호수, 장미꽃, 주유소를 성공이라 간주하면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 문화로 가는 길, 예술로 가는 길도 마찬가질 겁니다. 파리는 가을처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오는지 가는지도 모릅니다. 가을이 왔는데도 가을에 관심을 주지 않으면 가을은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서운한 가을이 말을 한다면 ‘참 무정한 사람이로군’이라고 한 마디 던질 겁니다. 그래도 온유한 가을은 또 올 겁니다.
주변엔 계절을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슬며시 SNS에 나타나 말을 겁니다. 시를 적어 보내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저에게 ‘가을이 왔어. 그래도 나는 너를 잊지 않아’라고 속삭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립니다.
2010년에 서울대에서 ‘방송분석’이라는 수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강원도 고성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고성에 소설가 김하인 씨가 사는데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제목(<국화꽃 향기>)으로 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번 들르겠다고 지나가듯 말한 약속이 느지막하게 이루어진 겁니다. (참고로 그는 제가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할 때 사제의 연으로 만났습니다.)
고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학생들에게 여행의 기대감을 몇 개의 단어들로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늘 앞자리에 앉는 국문과 복학생 조영민 군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 여행을 마치고 학생들이 사진첩을 제게 선물했는데 그 작은 앨범 표지에도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혼식 때 제가 주례를 선 조영민 군은 졸업 후에 드라마 PD가 되었습니다. 그가 연출하는 드라마 기획안 어딘가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비유하자면 <파리로 가는 길>은 예고 없이 받은 가을 보너스 같은 영화입니다. 포스터가 마음을 끌어당기긴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바쁘다는 이유였죠. 그러다가 ‘뜻밖의 사람들’로부터 ‘마음이 움직이는 시간’을 선물받게 되었습니다. 초대권을 상상하시나요? 아닙니다.
먼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재단의 대표로서 1년에 몇 번은 서울시의회에 가야 할 일이 생깁니다. 물론 자발적인 방문은 아닙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준비를 아무리 해도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현기증 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한 ‘뜻밖의 사람들’은 바로 시의원들입니다.)
그날도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시의회에 출석했습니다. 평상시엔 아무리 일찍 끝나도 저녁시간까지는 머물러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사회를 맡은 의장이 평소 열변을 토하기로 유명한 몇몇 의원들에게 미리 당부를 하는겁니다. “오늘은 조금 짧게 부탁드립니다.” 솔깃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오후 4시쯤 질의응답이 모두 끝났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영화관을 향해 가는 길은 가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제가 선택한 <파리로 가는 길>은 그리 가벼운 여정은 아니었습니다.
80세가 넘은 여성감독(엘레노어 코폴라, 1936년생)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뭐가 그렇게 바쁜가?’ 영화제작자인 ‘마이클’(알렉 볼드윈)과 ‘앤’(다이안 레인)은 ‘바쁘게’ 사는 부부입니다. 칸에서 만난 ‘자크’(아르노 비야르)는 마이클과 사업 파트너이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그는 수없이 묻는 앤의 질문 “파리, 오늘은 갈 수 있나요?”에 느긋하게 답변합니다. “걱정 말아요. 파리는 도망 안 가요.” 영화의 원제목도 <Paris Can Wait>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두를까요? 왜 이렇게 바쁜 삶을 살까요? 90일이나 기다려주는 가을에게 왜 눈길 한 번 안 주는 걸까요? 영화를 보면서 뜻밖에도 미스터리 스릴러 <곡성>이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 ‘뭣이 중헌디?’와 <파리로 가는 길>이 던지는 메시지가 비슷하다고 느낀 겁니다.
가을은 가지만, 아니 갈 터이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을은 또 오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은 다 살아있는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언젠가 우리에겐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늘 기다려줄 줄 알았던 가을과는 그렇듯 덧없이 이별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갑니다. 그러나 성공을 마지막 목적지로 설정하면 평생 몇 번 성공 못합니다. 작은 일에서 찾는 소소한 기쁨, 이를테면 파리로 가는 길에 만난 정원, 호수, 장미꽃, 주유소를 성공이라 간주하면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 문화로 가는 길, 예술로 가는 길도 마찬가질 겁니다. 파리는 가을처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