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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상담소

3월호

별자리 운세도 신통치 않을 때예술적으로 상담해드립니다
“똑똑똑… 여기가 ‘예술적 상담소’ 맞나요?”
여러분의 어떤 고민도 예술적으로 상담해드리는 ‘예술적 상담소’.
온라인으로 별도 공간을 마련해 고민 상담을 위한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올려주신 고민에 대한 예술적 대책을 찾아 답변을 달아드립니다.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sfac.or.kr) - 열린광장 혹은 페이스북 탭에서 예술적 상담소를 찾아주세요!
다른 사람의 고민에 댓글을 달 수도 있답니다.
채택된 질문은 [문화+서울]에 게재되며, [문화+서울]을 1년 동안 보내드립니다.

예술적 상담소 관련 이미지

예술적 상담소 관련 이미지

경쟁입찰 시스템 속에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있는데,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계속해야하는 걸까요?

디자인 에이전시에 다니고 있습니다. 매번 경쟁입찰에 참여하여 제안서를 제출하고 프레젠테이션 하는 과정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있죠. 네, 그게 제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 인격모독 수준의 평가위원들을 겪으며 자존감이 점점 하락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공공기관 경쟁입찰에 참여했을 때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 뻔했을 정도로 독한 수모를 겪었습니다. 작업물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자신만의 난해한 기준’으로 직업인으로서의 자질을 비난하는 등 개인 탤런트를 혹독하게 평가하는 오디션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에 나온 줄 알았습니다.) 공개 오디션은 조언이라도 해주지, 이건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모욕감만 남았을 뿐입니다. 무한 경쟁입찰 시스템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만든 이런 해괴한 사회 풍토 속에서 자존감을 무너뜨려가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네요. 자괴감마저 드는 요즘입니다.

예술적 상담소 관련 이미지

디자인을 한다는 것,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단순히 디자인만의 문제라면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적어도 이론상으로 디자이너는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배워왔으니까요. 하지만 상담 요청하신 고민은 어쩌면 제도적 문제, 즉 디자인을 경쟁입찰로 평가하는 방식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무한 경쟁 속에서 계속 디자인을 하는 것이 괜찮은지에 관한 인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디자인을 한다는 것, 그리고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가장 근본적 문제 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동시에 직업과 가치관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 역시 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여전히 쉽게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고민들입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들을 제 앞에 닥친 하나의 ‘벽’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 벽에 서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를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서 생각하다 보면 그 벽의 의미와 벽을 극복하는 방법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그 벽을 반드시 부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벽을 뛰어넘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벽에 문을 내기도 합니다.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하고, 그것과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지요.

현재진행형인 문제들과 현재진행형의 절망들

잘 아시겠지만 공공기관에서 발주되는 프로젝트는 ‘기회의 평등’, 즉 공정성을 중요시합니다. 경쟁입찰로 수행 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여전히 공공기관에서 선호하는 방식이고 제도적으로 크게 개선될 전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디자인 에이전시에 근무하면서 경쟁입찰을 피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듯 보입니다. 때로는 공공기관에서 평가에 참여하는 위원들에게 ‘인격모독성’ 발언은 자제해달라는 사전 요청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위의 사례는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같은 일이 반복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먼저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방법을 제안하자면 근무환경, 즉 디자인 에이전시를 바꿔보는 것입니다. 경쟁입찰에 참여하지 않는 범위의 업무를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모욕감을 느끼고 자존심을 무너뜨려가며 현재의 회사를 고집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가능한 대안일 것 같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상황을 조절하기 어렵다면,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디자인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현실적 고민에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종종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디자인만 하는 것이 제일 쉬운 일”이라고요. 디자인은 디자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전개 과정과 상황 전체,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커뮤니케이션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하는 데 있어 다른 여러 부차적인 문제들을 견딜 수 없다면, 자신의 적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때론 디자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해야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압박이 스트레스의 임계치를 넘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찾는 것도 괜찮을 듯 보입니다. 그래요. 말씀드렸듯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고민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또다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가능한 대안은 제기된 문제에 관한 해결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해 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같은 업(業)을 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한 디자인 관련 제도와 정책에 관한 문제들은 많은 디자이너들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모여 공동으로 토론하는 장을 마련하고 함께 고민한다면 창의적 해결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디자이너란 직업은 이런 고민을 하기에는 너무 바쁜 게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당장 바쁘다는 핑계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동의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지금의 무한 경쟁입찰 방식과 최저가 낙찰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문우답으로 대신하다

고민에 대한 적절한 상담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고민과 혼동을 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제기하신 문제는 디자인 에이전시에 근무하고 있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정말 중요하고 시급한 고민거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닌 현문우답(賢問愚答)으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야근과 박봉, 디자인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디자이너의 인권 문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임헌우_ 디자인학 박사. 디자인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현재 계명대학교 시각디자인전공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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