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희 작 상상해볼 뿐이지
* <10분 희곡 릴레이>는 젊은 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재기발랄한 10분 단막극입니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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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 구씨, 허씨
- 무대
-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습하고 어두컴컴하다
서서히 밝아지면 구덩이 안 구씨와 허씨, 삽질을 하고 있다.
각자 묵묵히 열심히 한참 동안 삽질을 한다.
- 허씨
- (삽질을 멈추며) 난 이제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돼?
- 구씨
- (계속 삽질하며) 잘 하다가 왜 그래.
- 허씨
- 못 참겠다고 이제 더 이상. 나 그냥 다 관둘래. 이놈의 삽들 다 분질러버리고 콱 죽어버릴래. 별 반응 없이 계속 삽질하는 구씨.
- 허씨
- 넌 지치지 않냐? 그만하고 싶지 않아? 항상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 구씨
- 별수 없잖아.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거밖에 없어. 있는 거라곤 흙과 삽뿐이니까.
- 허씨
- 그렇다고 계속 이 짓이나 하면서 썩어 없어지자고? 햇빛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주저앉으며)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 그런 거 있잖아. 꿈에서 깼는데 또 꿈이고, 또다시 깨어도 다시 꿈인 거.
- 구씨
- 악몽?
- 허씨
- 맞아, 악몽. 악몽이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 구씨
- 꿈속에서 뭘 했는데?
- 허씨
- 뭘 하긴. 삽질했지.
- 구씨
- 꿈에서도? 삽질만 하는 건 꿈이나 현실이나 똑같구나.
- 허씨
- 넌 안 그러냐?
- 구씨
- 난 이제 꿈 안 꿔.
- 허씨
- 넌 잠을 안 자잖아.
- 구씨
- 난 늘 자고 있는데?
- 허씨
- 넌 매일 이 짓만 하잖아.
- 구씨
-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일이지.
- 허씨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여하튼 꿈에 계속 파고 또 팠는데도 제자리인 거야.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지. 발은 땅바닥에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고, 팔로는 계속 이 짓만 하고 있고. 게다가 파면 팔수록 밑으로 막 가라앉으려고 하잖아. 그래서 막 소리쳤지. 살려달라고.
- 구씨
- 거기서 널 살려줄 사람이 어디 있냐? 스스로 빠져나와야지.
- 허씨
- 악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아?
- 구씨
- 꿈인 걸 인식하면서 꾸는 거야. ‘아, 맞다. 지금 이거 꿈이지. 어라, 또 꿈이네.’ 이러면서.
- 허씨
- 그게 가능해?
- 구씨
- 나도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어.
허씨, 누워서 두 눈을 감는다.
- 구씨
- 그러지 말고 삽질이나 해.
- 허씨
- 난 이제 안 할 거라니까. 나 잠들면 흙이나 좀 덮어줘. 굿바이. 마지막 인사야. 난 이제 진짜 그만할 거야. 그동안 즐거웠다.
- 구씨
- 진심이야?
- 허씨
- 진심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쩔 거야. 난 이제 아무것도 안 할래.
- 구씨
- 그래, 너 맘대로 해라. 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삽질하는 게 나으니까.
구씨, 계속 삽질을 한다. 좀 지루한 시간이 오간다.
- 허씨
- 얘기할래?
- 구씨
- 지금 하고 있잖아.
- 허씨
- 재미없는 얘기 말고, 재미있는 얘기.
- 구씨
- 너가 해봐. 재미있는 얘기. 너 상상 잘하잖아.
- 허씨
- 상상?
허씨, 상상에 빠진다. 상상을 하는 중에도 구씨의 삽질은 계속된다.
- 구씨
- 상상해?
- 허씨
- 응.
- 구씨
- 무슨 상상?
- 허씨
- 이곳을 빠져나가는 상상. 우린 이곳을 빠져나가게 될 거야.
- 구씨
- 어떻게?
- 허씨
- 나갈 구멍을 찾게 된 거지. 빠져나갈 구멍 말이야.
- 구씨
- 그 상상 끝엔 뭐가 있어? 이곳을 빠져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 허씨
- 이상하게도 난 이런 상상을 한 날이면 무서운 악몽을 꿔. 빠져나가도 빠져나가도 계속해서 같은 구덩이가 나와서 도저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도 역시나 지금과 똑같은 삽질을 하고 있고.
- 구씨
- 현실 같은 악몽이지.
- 허씨
- 악몽 같은 현실이지. 이제 너가 해봐. 재밌는 상상.
- 구씨
- (골똘히 생각하다가) 난 대박 나는 상상 할래. 으리으리한 금 장식이 된 삽을 발견하는 거지.
- 허씨
- 겨우 삽?
- 구씨
- 이건 그냥 삽이 아니야. 아무리 삽질을 해도 전혀 힘이 들지 않는 삽이지. 무게는 솜털을 들고 있는 것처럼 가벼울 거야. 어쩌면 삽이 저절로 움직여서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삽질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허씨
- 그런 삽이 어디 있어?
- 구씨
- 상상하라며. 내 머릿속에 있지.
- 허씨
- 그래 상상은 자유니까.
- 구씨
- 그래 자유니까.
다시 삽질에 열중하는 구씨. 허씨, 구씨가 삽질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 허씨
- (매료된 듯) 너가 삽질하는 걸 보면 뭔가 숭고한 느낌이 들어. 뭐랄까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이야. 삽질 그 자체만으로도 말이야. 혹시라도 우리가 평생 여기에서 나가지 못하고 삽질만 하고 있더라도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너의 삽질하는 그 행위만으로도. 만약 너랑 내가 오랜 삽질 끝에 이 깊숙한 곳에서 죽는다면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우리의 화석을 발견하겠지? (황홀한 듯) 삽을 껴안고 죽은 너의 화석은 아마 박물관에 멋지게 전시될 거야.
- 구씨
- 난 화석으로 발견되고 싶진 않아.
- 허씨
- 그럼 어쩌려고? 여기에서 나가기라도 하는 걸 기대하는 거야?
- 구씨
- 난 사라지고 싶어, 완전히.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계속 이 삽질을 하다 보면 꼭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 허씨
- 그건 싫다. 난 차라리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쪽을 택할래.
허씨, 결국 다시 일어나 삽을 든다.
- 구씨
- 아무래도 안 되겠지? 그러게 그래봤자라니까.
- 허씨
- 언제고 감시인이 들이닥쳐서 더 깊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을지 모르니까. 여기보다 더 깊은 곳이 있기나 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보다 더 숨 막히는 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아.
두 사람, 함께 삽질을 한다. 묵묵히, 열심히, 한참 동안 계속되는 삽질. 두 사람, 조금씩 숨이 가빠진다.
- 허씨
- 근데 우리 지금, 파고 있긴 한 거니? 계속 삽질만 하니까, 이제 느낌도 안 나. 팔이, 감각을 잃어가고 있나봐. 지금 내가 삽질을 하고 있는 건지, 내 팔이 움직이고 있기는 한 건지. 나 팔 빠진 거 아니니? 힘들어 죽겠어.
- 구씨
- 더디지만 파고 있어. 자꾸 말하니까 더 힘든 거야.
- 허씨
- 말 안하고는 아무것도 못 하겠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거든.
- 구씨
- 그래도 힘을 덜 쓰려고 노력해봐.
계속되는 삽질에 지쳐가는 두 사람. 이제 삽질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 허씨
- 도대체 우린 언제까지 여기에서 이 짓을 해야 되지? 아무 기한 없이 똑같은 일은 한다는 건… 굉장히 지겨운 일이야. 그것도 맹목적으로.
- 구씨
- 맹목적으로?
- 허씨
- 맹목적으로.
- 구씨
- 우린 목적이 있으니까 맹목적인 건 아니지.
- 허씨
- 우리 목적이 뭐였지?
- 구씨
- 글쎄…. 일단 그냥 파기나 해.
- 허씨
- 그렇지? 파야 하니까 파는 거겠지? 근데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라고?
- 구씨
- 삽질하고 있잖아.
- 허씨
- 뭐라고?
- 구씨·허씨
- 삽질, 삽질, 삽질, 삽질, 삽질, 질, 질, 질, 질, 삿질, 삿질, 삿질, 삳질, 삳질, 삳질, 삳질, 샅질, 샅질, 샅질, 샅, 샅, 샅, 샅, 샅, 샅, 샅, 삽, 삽, 삽, 삽, 삽, 삽, 삽….
삽질은 점점 더뎌지고 둘의 힘도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다.
- 허씨
- 오늘따라, 하늘이, 왜 이렇게, 노랗지.(허씨, 쓰러진다.)
- 구씨
- 나도, 이제, 지쳐간다. 아, 도저히, 못하겠다. 정말, 하늘이, 노랗다, 노래.
구씨, 또한 쓰러진다.
두 사람, 누워서 노란 하늘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고 있다.
- 구씨
-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어. 노을 참 예쁘다.
- 허씨
- 보이지는 않아. 이곳은 지하 속 구덩이니까. 그저 상상해볼 뿐이지. 이제 넌 나보다 상상을 더 잘하는구나.
두 사람, 누운 채 노란 하늘을 한참 동안 응시한다.
하늘은 어느새 까맣다. 그리고 별과 달이 흐른다.
- 구씨
- 하루라도 삽질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누워서. 별도 바라보고.
- 허씨
- 상상해볼 뿐이지.
- 구씨
- 지금 우리가 한 이야기들 언젠가 했던 이야기 같지 않아?
- 허씨
- 그런가? 언제 했지?
- 구씨
- 아마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아.
- 허씨
- 그래? 그때도 그랬나?
- 구씨
- 어제 저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 허씨
- 늘 같은 이야기뿐이지.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언제 끝나게 될까?
갑자기 무대, 밝아진다.
- 구씨
- 글쎄, 연극은 벌써 끝났어. 저기 봐,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잖아.
- 허씨
- 그러네. 그럼 우린 영영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 구씨
- 아마 그렇겠지. 다음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무대 점점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삽질 소리.
- 작가소개
- <상상해볼 뿐이지>를 쓴 윤미희는 조지 오웰의 소설 제목과 같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국문과 학생이었지만 문예창작과 수업을 더 많이 들으며 남몰래 작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쓴 희곡으로 교내 문학상 장원을 받으며 희곡 쓰기에 탄력을 얻었고 곧 등단할 거라는 뻔뻔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이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음에도 희곡에 대한 무한 사랑은 점점 커져만 갔고 급기야 스스로를 ‘윤미희곡’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희곡과의 운명적 사랑을 믿으며 끊임없는 창작 활동을 해오다가 얼마 전 처음으로 부산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쓴 문장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을 통해 실현되는 상상을 하며 새로 쓸 희곡을 구상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녀의 희곡을 향한 삽질은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 소개글 오세혁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