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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해방촌발 남산 러너의 하루, 그리고 사계절 남산을 달리다
‘걷기’는 금전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상의 것 중 하나다. 걷기 좋은 길을 가까이 두고 산다는 것 역시 최상의 행복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찰나의 경험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촌과 남산은 행복의 다른 가치를 찾는 이들에게 최고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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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이방인들이 아름답게 얽힌 숲

나는 무척 산만한 편이다. 하루라도 나가서 걷거나 뛰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만화가 겸 삽화가로 살고 있는 나에겐 그리 좋지 않은 성향이다. 모름지기 그림도 만화도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고 선배들로부터 배웠지만 타고난 습성인지 좀체 고쳐지질 않는다. 집중이 잘 안될 때면 나는 ‘별수 없지’ 쿨하게 인정하고 남산을 오른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남산 바로 아랫 동네인 해방촌에 자리 잡았을 때엔 오랜 웹툰 연재에 몸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게다가 서울에 와서 보니 난 정말 가난한 부류였기에 (아… 대전에 있을 땐 그런 의식을 못했거늘…) 여기저기 놀러 다닐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일은 없고 시간은 많던 때인지라 슬프게도 산책 말고는 할 만한 게 없었다. 돈이 없어 달리 선택권이 없던 나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건강한 삶이라니, 아… 내 팔자야.
처음 산책을 시작하던 때에는 해방촌을 올라 버스로 서너 정거장 거리인 남산도서관까지 걷는 것도 힘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고 시야가 흐려져 풍경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 번 산책을 반복하면서 높은 데 올라 땀을 닦고 서서히 정신이 들어 풍경을 보니 해방촌이란 곳은 참 신기한 동네였다.
‘큰 밭(大田)’이라는 이름처럼 평평한 대전에서 지내다가 드라마에서나 보던, 산자락에 집이 빼곡히 자리 잡은 서울의 동네 풍경을 보니 신기했다. 나는 드라마 속 가난하지만 긍정적인 여주인공의 기분을 느끼며 ‘아 참 예쁘구나’ 했다. 이곳은 해가 지면 또 사는 사람만큼 많은 불빛이 산자락을 덮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이북의 피난민들이 38선에 가로막혀 실향민이 된 채 자리 잡은 동네, 그래서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곳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그림 작업하는 친구도 많고 이태원 부근이라 외국인도 많다. 그런 이방인들이 오래된 숲속의 바닥에 나무 뿌리가 얽힌 것처럼 얽혀 살고 있다. 여긴 숲이다. 강남 복판이나 뉴타운처럼 경지 정리가 잘된 공원이 아니라 다양한 종이 모여 나름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숲.

달리기, 그리고 남산의 발견

산만한 나는 이후로도 다양한 풍경을 걸었다. 해방촌을 지나 중국인 관광객 가득한 남산타워(‘N서울타워’라는 이름은 왠지 입에 잘 붙질 않는다)에 올랐고, 남산타워 옆 펜스에 잔뜩 걸려 있는 사랑의 자물쇠를 보며 큭큭 웃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체력이 좋아져서 달릴 수도 있게 되었다.
명동 케이블카 쪽에서 시작해 국립극장으로 이어지는 남산 둘레길은 달리기 동호인들이 자주 달리는 곳이다. 호기롭게 그 길을 처음 달렸을 때가 생각난다. 70대로 추정되는 할아버지보다 처지고, 앞서 있지만 만만해 보이던 여성 분이라도 따라잡아야지 했다가 오버페이스로 주저앉았던 나날….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계속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난 42km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돈이 없어서 시작한 산책이 이렇게 여전히 비경제적이지만 나름의 성취를 안겨주었다는 건 참 흐뭇한 일이다. 산만함이 내게 준 행복이라고 할까.
언젠가 새벽에 달리다가 맹인인 러너(runner) 분이 앞에서 가이드해주는 분의 줄을 잡고 함께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조용한 새벽, 숨소리와 발 디디는 소리만 들리는 남산 길이었다. 이 길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또 좀 더 다양한 길을 찾다 보니 남산에는 신기하게도 도롱뇽 알이 가득한 개울도 있었고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하지만 지역 주민 분의 이야기로는 몇 년째 볼 수 없다고 한다.)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며 살아가는 기쁨

국립극장에서 장충동을 지나 소위 ‘냉면벨트’라 불리는 을지로를 산책하고 냉면을 먹는 것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산책 코스다. 또한 꽃피는 봄에 멀리 뚝섬 가기 전 개나리 가득한 응봉산에서 매봉산을 거쳐 벚꽃 가득한 남산까지 걸어오는 길은 내가 가장 황홀해하는 봄 산책의 연례행사다. 여름이 되어 인공 개울이 옆으로 흐르는 둘레길을 달리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일이다. 가을, 은행나무가 노랗게 가득 채워진 소월길을 걷는 것도 좋다. 그리고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강아지처럼 밖에 나가 오독오독 눈을 밟아 남산을 오르는 일도 좋다.
내가 산 아파트(라는 게 있다면) 가격이 마구 뛰는 일도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난 불확실한 행복을 좇는 것보다 남산의 조망권 때문에 아파트가 들어설 수 없는 이 동네에서 살며 계절이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지역에서 살고 산책하는 일이 젠트리피케이션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여전히 비경제적인 삶의 기쁨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문화+서울

글 오동진
야후 웹툰에서 <드림캐쳐>와 <지구정복일기>를 연재했다. 현재는 집에서 살림하며 작업하는 생계형 프리랜서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그림 M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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