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는,
책으로 건네는 인사
정신을 차려보니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던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다. 연말이 되면
마음이 땅에 붙어 있지 못하고 한 뼘 정도
둥둥 떠 있는 기분인데, 어떤 날은 왁자한
파티 같다가도 또 어떤 날엔 마음이 허해서
죄다 시큰둥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너무 시큰둥한 나머지 평소에
좋아하던 책도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거다.
그렇다면? 글자 수가 적고, 끊어 읽을 수 있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게 누군가에겐
만화일 테고, 짧은 에세이일 수도 있겠으나
시 또한 그렇다. 글자 수가 적다는 게 읽기
쉬움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시기엔 뭐든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
문학동네 시인선이 200번째라는
숫자를 달았다. 문학동네는
문학과지성사·창비·민음사와 함께 한국
시집을 꾸준히 펴내는 대형 출판사인데,
200번이라는 숫자를 기념하며 두 권의
한정판 도서를 동시에 출간했다. 1번부터
199번 시집에 등장하는 시인의 말을 한데
묶은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과 201번을
시작으로 앞으로 함께할 시인 50명에게 시란
무엇인지 묻고, 그들의 신작 시를 함께 담은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가 그 두 권의 책이다.
특히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의 책값은
놀랍게도 3천 원이다. 대형 출판사가 할 수
있는 멋진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시는 내게 늘 조금은
어려운 텍스트라, 첫 장에 있는 시인의 말만
읽고 크게 감동한 뒤 정작 그 안의 시들은
다음을 기약한 적이 많다. 단언컨대 나만
그런 것이 아닐 테다. 그래도 충분히 좋았다.
그렇게 시인의 말을 읽을 때면 ‘안녕’이라는
단어와 닮았다고 느꼈다. 첫 만남, 첫인사,
첫인상이자 시를 한데 모아 엮은 뒤 품에서
떠나보내며 쓰는 작별 인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끝과 시작에서 인사를 다르게 하지
않고 안녕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인사가 단박에
반가우면 그 시집의 시들도 마음에 크게
와닿는 경우가 많았다.
멀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헤어짐은 다른 의미의 마주침이다.
→ 82쪽, 『죄책감』 임경섭 시인의 말
오랜 시간 문학에는 밑줄을 치지 않으며 읽었다. 정보를 얻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집에 있던 아주 오래된 소설책에서 밑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지금은 심상히 넘겼을 문장들에 밑줄이 꼼꼼하게 그어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읽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시선을 사로잡아 잠시 흐름을 끊는 그 밑줄들이 오히려 좋았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갈구했길래 여기에 밑줄을 쳤을까? 하며 지난 시간을 더듬었고, 여기까지 살아내서 다시 이 책을 읽는구나 싶어 스스로를 제법 기특하게 여겼다.
아름답게 용기 내어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고맙다.
→ 203쪽, 『여름 키코』 주하림 시인의 말
그래서 이번엔 시인의 말에 과감하게 밑줄을
그었다. 먼 훗날의 나를 웃기고 울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읽었다. 시는
무심히 넘기자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건
글씨라고 읽기 십상이니까. 제각각 인사들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시인의 말 위에 적힌
시집의 제목도 살펴 읽었다. 마음에 든 건
다음에 읽을 시집으로 메모했고, 그중 몇 권은
집 앞 동네 책방에 가서 데려왔다. 시집의
제목은 아름답고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선뜻
손을 뻗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렇게 시인의
말을 먼저 읽고 나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떻게든 알고 싶은 제목이 되었다.
연말이 되면 돈 나가는 일이 많아서 나도
모르는 새에 주머니가 홀쭉해진다. 마음을
전하고 싶은 친구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렇다면 시집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다른
책보다 값도 저렴하고, 한 구절을 빌려서
올해 받은 마음에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좋다.
실제로 내가 일하던 책방에서도 연말이면
시집 매출이 훅 뛰었다. 사람들이 흰 입김을
두르고 들어와 들뜬 표정으로 시집 앞을
서성이는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했다. 물론 누구를 만나는 대신
자신에게 선물해도 좋다. 그 과정에서 연말
특유의 뜻 모를 쓸쓸함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시를 읽는 시간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니까. 시는 그것을 알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커다란 혼자
→ 177쪽,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장수양 시인의 말
‘삶은 책이다’라는 말은 흔히 쓰이는 비유라 재미가 없을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이만큼 정확한 비유가 없지 싶을 때도 있다. 올해도 우리의 페이지는 어떻게든 넘어갔다. 까맣게 쓰인 페이지도, 어쩐지 비어 있는 페이지도 있을 것이며, 물을 엎질러 우그러진 곳과 커피 자국이 남은 곳, 어쩌면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몽땅 찢어버린 페이지도 있을 것이다. 모두 괜찮다. 다행히도 반드시 일 년에 한 번은 새롭게 쓸 수 있는 희고 깨끗한 페이지가 주어지니까. 그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곧 받을 새로운 페이지를 나는 이런 마음으로 채워보고 싶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게,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가볍게,
→ 228쪽,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천서봉 시인의 말
나중에 우리는 ‘나’라는 책의 맨 앞에 어떤 말을 쓰게 될까. 우리가 아직 쓰지 않은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글 손정승 『아무튼, 드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