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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추락 II> 추락의 경로, 혹은 길 잃기의 경로

프로젝트그룹 빠-다밥의 연극 <추락 II>

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쉰두 살의 대학교수 데이비드 루리는 지금껏 쌓아온 것 모두를 송두리째 잃는다. 그야말로 추락이다. 진상조사 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상대 학생, 아이삭스의 진술과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겠노라 말한다. 진술서는 읽지 않는다. 아이삭스가 왜 그렇게 진술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형식적인 사과만으로도 무마할 수 있다는 동료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그는 대학을 떠나기로 한다. 아이삭스의 진술, 혹은 본심은 관객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루리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끝이 좋지 않게 돼버린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머지않은 50대 이혼남이 아니라 에로스의 노예라는, 그러나 절제할 수 없어 저지른 일은 아니라는 그는 유죄를 인정하고 항변하지 않는다. 이로써 사회·제도·문화 따위를 단번에 비웃는다. 그렇다면 이 추락은 거짓이거나 다른 사건을 경유한 일이다.

선택을 이해하기

이제 전직 교수가 된 루리의 딸, 루시 루리는 이주해 들어온 이들의 공동체가 붕괴된 후에도 마을의 유일한 백인으로 남아 개척 농장을 운영하는 젊은 여성이다. 데이비드 루리가 찾아와 함께 지내던 중 루시 루리는 집을 습격한 괴한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경찰에는 강도가 들었다고만 신고하지만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사랑이 싹틀 거라고, 낳겠다고 말한다. 모성애가 있을 거라고 믿어야 한다. 땅을 노리는 옆집의 페트루스와 결혼하기로 한다. 세 번째 부인쯤이다. 땅을 주고 안전을 사는 거래다. 루리가 진정으로 추락하는 것은 아마 이 대목에서다. 딸을 ‘존중’해 농장을 마련해 주던, 이제는 농장을 접고 안전한 곳으로 떠나도록 딸을 설득하지 못하는 아버지로서의 추락이다. 더 깊이 생각하면, 제도를 비웃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됐지만 다른 개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실패한 개인으로서의 추락이다. 루리가 비 웃을 수 있던 세계가 루시에게는 비웃기는커녕 맞서 싸울 수조차 없는 상대다.
루리가 역사 밖의 개인으로서 사태를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할 때, 루시는 역사 속의 개인으로서 사태를 경험한다. 루시는 외롭고 철저한, 자유롭지 않고 힘없는 개인이다. 역사에 속하지만 역사의 일부는 아닌, 역사에 속하지만 자신의 자리는 갖지 못한, 하지만 언제나 개인 대 개인으로서 역사를 겪는다. 그렇다면 내가, 혹 은 루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루시의 선택이 아니라 루시의 존재 지평 그 자체다.
루시는 좀 더 안전한 세상이 될 때까지 어디로든 떠나라는 루리의 제안을 거절한다. 지금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철저히 혼자일 이곳에 남기로, 철저히 혼자서 결정한다. 페트루스와의 거래를 받아들이며, 땅은 넘겨도 좋지만 집만은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둬야 한다고 말한다. 낯선 곳으로 들어와 직접 일군, 유일한 자신의 자리다. 어쩌면 외로워도 괜찮은 유일한 자리.1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철폐 이후의 흑백 대립을 다룬 원작이나, 공연 소개에 차별 금지법과 트랜스젠더 혐오 등을 언급한 이 공연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좀 더 구체적인 현실과 개인의 대립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고했던 힘의 질서가 휘청일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단 혐오와 증오들이 날을 세워 일상 가득 금을 긋는다. 그어진 경계를 허무는 일은 위협과 공포로 다가온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라는 공연 소개의 질문을 마주하며 어떤 의미에서의 ‘우리’에 나를 대입해야 할지 확정하지 못했다.

읽기를 방해하는 몸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본다. 진상조사 위원회 가운데에 루리가 앉아 있다. 조사 위원의 말에 따르면 ‘백인 남성’이다. 주위에 있는, 그러니까 세 조사 위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들을 연기하는 것은 여성의 몸이거나 남성의 몸, 장애인의 몸이거나 비장애인의 몸, 한국계의 몸이거나 외국계의 몸이다.(엄격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러한 몸인지는 물론 알지 못한다. 내가 배워온 기준으로는 겨우 외관만을 참조해 판단하기로, 그렇게 분류될 법한 몸들이다.)
백인 남성으로 그려지고 한국인 비장애 남성으로 보이는, 그러니까 정상의 기준에 가장 가까운 몸을 그렇지 않은 몸들이 심문한다. 몰래 혹은 공공연히 그를 응원하는 것 역시 그런 몸들이다. 이 몸들이 무엇을 연기하고 있는지(어떤 인종과 성별과 나이를 연기하고 있는지, 그 몸의 장애 여부는 어떠한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무대 위에 제시되는 것들은 이 짐작에 쓰기에는 부족하거나 넘친다. 판단을 유예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다. 극 중 인물이 어떤 몸을 가졌는지를 식별하려 들지 않거나, 상상된 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자 한다.
이 모호함 혹은 풍성함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지평에 가닿을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도달하지 못했다. 사라지는 몸들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몸들을 생각했다. 무대에 모습은 비치지만 제 언어를 갖지 못하는 몸들, 무언가 말해도 언제나 다른 이의 다른 말이 따라붙고 마는 몸들을.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추락II>

일자 2021.7.9(금)~18(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J.M.쿳시-DISGRACE

번역 황은철 각색·연출 김한내

출연 이윤재·이세영·윤현길·마두영·신강수 이송아·김민희·Anupam Tripathi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강지혜

의상디자인 홍문기 음악·음향디자인 배미령

음향감독 김나연 영상감독 김성하

그래픽디자인 황가림

조연출 이효진·김민희 사진촬영 김솔

영상촬영 김지은 프로듀서 김민솔

배리어프리공연 (주)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박종주 대학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같은 기간 몇몇 사회단체와 진보정당 등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몇 개의 창작집단과 사회 단체를 통해 창작자나 연구자,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주로 예술과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사진 제공 프로젝트그룹 빠-다밥 ⓒ보통현상_김솔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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