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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쥐잡기 운동과 저축 운동그 시절의 범국민 캠페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 도심 관공서와 대형 건물에는 연일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요즘은 이메일과 문자, SNS 등 공지사항을 전달할 방편이 많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물에 정부가 강조하는 내용을 담아 현수막을 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주 내용은 ‘쥐잡기’와 ‘저축’, ‘반공방첩’ 등이었습니다. ‘구서’(驅鼠)라고 했던 쥐잡기 운동은 식량이 부족했던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습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을 축내고, 병균도 옮기는 쥐를 없애기 위해서였죠. 또 재무부에서는 범국민적인 저축 운동도 추진했습니다.

1971년 서울시청 앞 풍경

<사진> 1971년 서울시청 앞 풍경.

쥐를 잡읍시다!

<사진>은 1971년 서울시청 앞 풍경입니다. 오른쪽 아래 시청 별관 벽에 ‘3월 25일 오후 7시 쥐약 놓는 날, 다 같이 쥐를 잡읍시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1억 마리의 쥐가 있었으며, 그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32만t에 달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쥐잡기를 독려하기 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표어와 포스터를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또 도별로 할당량이 배정됐고, 쥐꼬리를 보건소에 가져가면 보상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1948년 ‘페스트 침입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시에서 초등학교를 통해 쥐잡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현상금으로 1등 10만 원, 2등 4만 원, 3등 3만 원, 4등 2만 원, 5등 1만 원을 걸었습니다. 또 1954년 9월에는 일주일 만에 전국에서 67만 마리의 쥐를 잡았습니다. 1955년 한 신문에 재미있는 문답이 실렸습니다. “(문) 수개월 전 귀지가 국내에 있는 쥐의 수를 6억 마리라고 했는데 그 후 죽은 수와 탄생한 숫자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6억 마리는 보건부에서 ‘쥐잡기 운동’을 위해 추산해놓은 숫자입니다. 쥐의 탄생 수와 사망 숫자는 사람이나 소처럼 쥐의 호적이 생기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쥐에게도 제2국민병수첩 같은 것을 갖고 다니게 했으면 몇 놈이 전사했고, 또 몇 놈이 대인전선에 나타났는지 알겠는데 도무지 철의 장막 속같이 일체 그들의 통계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보건 당국에서도 쥐 소탕전을 전개했으나 병력의 적정을 몰라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고 합니다.”
쥐를 잡기 위해 보건소에서 무상으로 쥐약을 나눠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쥐약과 관련된 사고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쥐약을 먹고자살한 사례가 많았으며 불화가 이어지던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밥에 쥐약을 넣은 부인도 있었습니다. 또 이웃집과 갈등을 빚다가 복수하기 위해 이웃집에서 기르던 소, 돼지에게 쥐약을 먹여 독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고양이를 길러 쥐잡기 운동을’이라는 칼럼도 실렸습니다. “정부는 쥐약을 공급해서 쥐잡기를 널리 권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좋은 현상이며 쥐약을 놓을 때 쥐가 많이 죽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에는 쥐가 다시 번성한다. 효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쥐약을 공급하기보다는 차라리 고양이 기르기를 장려했으면 한다. 농촌 각 마을에 고양이 10여만 마리만 기른다면 쥐는 아마 전멸하고 말 것이다.”

경제 개발과 저축 운동

<사진>에서 왼쪽 서울시청 본청 건물에는 ‘1조 원 달성 특별 저축 강조 기간’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고, 오른쪽 높은 건물에는 서울은행에서 내붙인 ‘중단 없는 전진! 저축으로 밀고 가자’란 내용의 현수막도 걸려 있습니다. 경제 개발 속도를 높이던 시기에는 외자 도입에 힘을 쏟았지만 내자 동원을 위한 저축 운동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학교와 직장에 저축조합이 만들어져 누구나 저축에 대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에 자발적 저축이 아닌 강제 저축이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염려도 나왔습니다. 결국 1971년 4월에 저축액 1조 원을 달성했고, 그달 17일 시민회관에서 국무총리와 재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열고 유공자를 표창했습니다.

사진 고(故)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글 김구철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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