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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화가 정재호의 세운상가서울의 타임머신
정재호 화가에게 세운상가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공간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 택시를 타고 삼일고가를 지날 때면 유연한 곡선을 따라 달리는 차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기다란 빌딩, 그리고 그 양끝을 가늠하기도 전에 차창 뒤로 사라지는 건물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고 한다. 삼일고가 너머로 바라본 청계천 주변은 어린 그에게 미래에 대한 황홀한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삼일아파트를 지나 삼일빌딩까지 이어지는 공중의 경험은 자동차가 하늘을 나는 미래가 그리 멀리 않았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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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서울의 풍경.

다시 찾은 세운상가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낡아가는 법이다. 삼일고가도 세운상가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낡아갔다. 그때마다 그곳의 이미지는 다르게 다가왔다. 막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친구들과 세운상가 2층 데크의 후미진 곳에 숨어 있는 도색잡지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학생, 뭐 찾아?”라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자리를 내뺐다. 용기가없어 한 번도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당시 세운상가는 막 거뭇해지기 시작한 소년의 욕망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그즈음 용산에 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세운상가에서는 미래도 첨단도 자취를감췄다. 정돈되지 않은 잡화와 습한 기운이 무질서하게 엉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다시 세운상가를 찾은 것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아빠가 된 무렵이었다. 밀레니엄을 몇 해 넘긴 2000년 중반, 작업할거리를 찾아 세운상가를 누볐다. 청계천은 새로 부임한 시장의 공약을 이행하느라 공사판이 되어 있었다. 삼일고가가 사라졌고 삼일아파트는 2층만 남았으며, 콘크리트 틈새로 철근이 드러나 보이는 흉한 모습의 세운상가는 곧 철거될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로부터 또다시 10여 년이 흐른 2017년, 나는 다시 세운상가를 찾았다. 이번에는 학생들과 함께였다. 수업 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보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강의실에서 백 번 얘기하기보다 직접 와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철거될 운명을 면한 세운상가는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단장하고 있었다. 그러다 세운상가의 옥상을 개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곳을 집합 장소로 잡았다.
나는 옥상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 건물과 장소에 대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옥상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무게감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선생님,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던 한 학생의 소감이 이 장소의 현재성을 압축하는 말이 되었다. 더 이상의 설명이 무색했고 그냥 아래에 펼쳐진 낡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화가인 내가 이곳을 과연 그려낼 수 있을까?’ 자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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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연결하는 보행 데크와 공사가 진행 중인 을지로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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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주변 건물의 옥상.

세운상가에 쌓인 시간의 켜

올해, 나는 다시 세운상가에 올랐다. 이번에는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그리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난간에 몸을 붙이고 시선의 아래에서부터 풍경이 끝나는 원경을 오르내리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물결, 어지럽게 이어지는 전선줄, 증축과 보수의 흔적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오래된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떤 건물은 미처 버리지 못한 철재를 옥상에 이고 있는가 하면, 어떤 건물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옥탑의 깨진 창문 구멍으로 잡초가 무성했다. 이 풍경을 뭐라고 해야 할까? 흉측하다고 해야 할까, 처참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삶의 풍경일 뿐이라고 안도해야할까? 모든 것은 낡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그런 운명에도달한 것들을 바라보는 일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스케치북을 꺼내서 쓱쓱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본다. 사진을 찍어서 보고 그리면 그만이고 이렇게 복잡한 풍경이 대강의 스케치로 옮겨질 리도 만무하지만, 굳이 스케치를 하는 까닭은 성급한 마음을 다스려 조금이라도 더 대상에 시선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다. 전체 구도를 잡기 위해 수평선을 긋고 앞쪽에서부터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건물들의 동선을 찾아 곡선을 잇는다. 이 곡선이 지나가는 지붕들 아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골목길들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건물들이 나열된 구획을 가로선으로 그어나간다. 무질서하게 보이던 풍경들은 이 간단한 작업을 통해 행과열의 규칙을 이루며 숨어 있던 도시의 질서를 드러낸다.
건물들을 스케치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건물의 양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맨 앞에 있는 분홍색 건물은 1970년대,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타일 양식으로 보아 1950~60년대에 지어진 듯하다.그 사이사이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있다. 중경의 가운데에는 형태가 잘 보존된 적산가옥이 보이고 그 왼쪽에는 작은 기와집도 끼어 있다. 더 원경으로 시선을 옮기면 다시 1960~70년대 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 1980년대, 1990년대 건물이 이어진다. 뒤로는 갑작스럽게 솟은 최근의 고층 건물과 초고층 아파트들이 원경을둘러싸고 있다.
시간의 켜(layer)들. 그러니까 이 풍경은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가장 오래된 시간부터 가장 최근의 시간으로 변화하는 시간의 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현듯 ‘타임머신 속에서 점점 바뀌는 도시 풍경을 본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하, 그렇구나! 내가 서 있는 이 세운상가라는 장소는 서울에 쌓인시간의 층을 보여주는 일종의 타임머신이구나!’ 순간 우울했던 감정이 사라지고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에 바쁜 서울이라는 도시의, 그것도 가장 중심부에서 속도를, 자본을, 새로움이란 운동을 가볍게 배반하는 공간이라니! 나는 사진기를 꺼내 건물들의 세부를 줌으로 당겨 찍기 시작했다. 그 조각들은 그림 속에서 다시 이어 붙여져 얽히고설킨 물질들의 사연을 증거할 것이다. 질감을, 색깔을, 부서진 것을 남김없이 그릴 것이고, 건물들의 양식을 꼼꼼하게 그려 그 시대의 흔적들을 다시 불러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어릴 적 보았던 만화에 등장하는 구식 로켓을 그릴 것이다.
“여기는 관제탑. 그 시절 당신들의 여행은 지금 어떠십니까?”

글·사진 정재호 화가, 세종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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