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경험의 만남, 장애예술 기획전
“앞으로 진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이 여러분의 작업과 기획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작가 오리엔테이션 때 전달한 말이다. 전시를 위해 큐레이터와 담당자가 전시를 기획·실행·포장하는 일을 한다면, 그 알맹이(원재료)가 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작업에 관해 고민하고, 글로 정리해보고, 이를 비평가 앞에서 발표하며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정리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전시실에 관람객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작가노트와 비평집이 비치됐으면 했다. 모든 프로그램이 하나의 목표를 향했다. 한 작가가 말한다. “작가노트를 정리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전문가와 이야기할 때 도움이 됐고, 포트폴리오를 보완할 수 있게 해주셔서 자신 있게 공개 크리틱을 할 수 있었어요.”
송상원 <숲속의 작은 친구들>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장애예술 지원 플랫폼이다. 지난 16년간 다수의 장애예술인을 지원하며 장애예술 분야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효성그룹이 후원하는 입주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결과 전시가 올해 10월,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다. 장애예술 기획전시 《내가 사는 너의 세계Your World I Live In》는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13기 입주작가의 서로 다른 인식의 체계를 바라보며 ‘나’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전시다. 이번 전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다양성’이다. 올해의 입주작가 6팀의 장르는 판화·구족화·회화·미디어·사진·오브제 등 전부 다르다. 기존의 장애예술 전시가 평면 회화 작품 위주로 진행됐다면, 올해는 다양하고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다. 또한, 이번 전시는 모든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다양한 배리어프리를 구현한다. 배우 안효섭과 함께하는 오디오가이드, 음성 센서, 출력물 점자 및 큰 글자 적용, 수어 가이드, 발달장애인을 위한 전시 설명 가이드(쉬운 정보), 바닥의 점자 블록 등을 구성해 배리어프리 특화 전시를 준비했다.
유다영 <Braille Image No. 1>
내용 면에서는 작가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경린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를 소개한다. “전시의 제목인 ‘내가 사는 너의 세계’는 미국의 사회 운동가로 잘 알려진 헬렌 켈러Helen Keller의 저서 『내가 사는 세계The World I Live In』1908에서 영감을 받았다. 저서에서는 본인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 책 속에서 자신만이 느끼는 특별한 경험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 우리가 함께하는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들여다본다.”
최서은 <한가로운 오후>
때때로 정리되지 않은 단어를 나열한 것 같은 글이나 메모 같은 글도 있지만, 작가노트는 작품의 시작점을 직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에 대한 소개와 작가노트 한 줄을 함께 들여다보자.
김진주는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식물의 생태 변화를 그린 구족화를 선보인다. 식물의 정보와 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간 단어들과 함께 세밀하게 묘사된 작품은 작가와 식물이 교감한 결과물이다. 작가의 세밀한 관찰 드로잉을 통해 식물의 세계에 관람객을 초대한다. “식물의 생태, 삶의 방식 등을 알게 되면서 관심이 갔다. 한 나무를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하고 변화 과정을 모두 기록한다.”(김진주의 작가노트 발췌)
김진주 <꽃과 그들의 수정>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오른손이 마비된 Q레이터의 일상 속 경험에서부터 라움콘의 작업이 시작된다.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장갑과 숟가락 등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도구들을 재창조한 오브제를 전시실에서 관람객이 직접 사용하고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한다. “도움이 필요한 몸이 아닌 다양한 몸으로서 유연하게 변화된 삶을 다시 디자인하는 일상의 실험”(라움콘의 작가노트 발췌)
박유석은 어린 시절 태양을 보고 난 뒤, 눈을 감아도 남아 있는 잔상에서 따스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작가는 이 잔상을 미디어, 빛, 소리를 활용해 전시실에 공감각적으로 풀어낸다. 관람객과 태양을 보는 놀이를 공유한다. “복잡한 세상에서 나의 작업을 보는 이가 세상과 잠시 떨어져 홀로 남기를 원한다. 잠시나마 스스로를 마주하고 자신이 찾은 안도감 속에서 세상과 함께하기를 바란다.”(박유석의 작가노트 발췌) 송상원은 자연 속에서 관심을 가져야 보이는 작은 존재들을 확대해 조명한다. 뿌리나 작은 풀벌레 등을 소재로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작가의 상상 속 또 다른 자연의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존재만으로 아름다운 가치를 가졌음에도 시선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으면서도 방법이 서툴러 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나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송상원의 작가노트 발췌)
라움콘 <한 손 두손가락 포크>
작품 속에 사진·글·점자를 함께 활용한 유다영은 사진을 시각이 아닌,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세 가지의 내용(사진·글·점자)은 뚜렷하게 연동되지 않아 관람객에게 작가의 감정 기록에 대한 비밀을 푸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가상 공간에 떠다니는 사진 이미지는 너무 많이 생산되고 삭제되고 있을 것 같다. 사진이 너무 쉽게 읽히거나 그 반대로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았다.”(유다영의 작가노트 발췌) 작가가 꿈꾸는 가상의 정원을 목판화로 선보이는 최서은은 동식물에게도 마음의 모양이 있다고 상상해 이를 패턴화한다. 패턴을 위한 선이나 동식물의 묘사를 위한 선들은 조각도로 파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해 더욱 생동감 있는 가상의 정원을 선보인다. “판각 작업을 하면 다른 판보다 나무 판이 더 친근감 있고, 사각사각 소리가 날 때마다 나무와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최서은의 작가노트 발췌) 서울문화재단과 예술의전당이 만나 준비한 기획전시 《내가 사는 너의 세계》에서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13기 입주작가 여섯 명의 다양한 인식의 체계를 바라보며 ‘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박유석 <Trace>
10월 6일부터 22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글 이화정 서울문화재단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