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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영화제는 어떻게 칸의 상징이 되었나

지난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남프랑스 칸에서 제76회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가 열렸다. 영화제 공식 경쟁작 21편, 주목할 만한 시선 19편, 경쟁 외 26편, 칸 클래식(고전) 22편 등을 비롯해 각 협회에서 주관하는 비평가 주간 24편, 감독 주간 31편 등 수많은 영화가 전용 극장 팔레 데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을 비롯한 칸의 영화관을 아침 8시 반부터 새벽 2시까지 빼곡히 채웠다.
올해 영화제는 앰버 허드Amber Heard와의 논란으로 수년을 칩거했던 조니 뎁Johnny Depp의 복귀 무대이기도,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가 10년 만에 다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Leonardo DiCaprio와 손잡은 신작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의 최초 상영 무대이기도 했으며, 다큐멘터리 거장 왕빙Wang Bing이 5년간 봉제공장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며 촬영한 <유스Youth (Spring)>가 베일을 벗은 곳이기도 하다.
저녁이면 칸의 거리는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사람들, 또 이들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복장 규정이 엄격한 칸 영화제의 특색이다. 매일 밤 레드카펫은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주드 로Jude Law 등 별들로 반짝였다.
여기서 묻는다. ‘프랑스 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그러나 영화제를 제외한다면? 대개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칸은 영화제가 곧 도시고, 도시가 곧 영화제로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전 세계에 축제 하나만으로 이토록 유명해진 도시가 있던가? 세계 3대 영화제 중 나머지 베를린과 베니스를 떠올려본다면, 두 곳 모두 영화제보다 도시 특유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칸=영화제’의 공식이 성립하는 이 위상은 대단히 독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칸은 어떻게 영화의 도시가 되었을까. 아니, 영화제는 어떻게 칸의 상징이 되었나.

바닷가 앞 하얗게 칠한 고급 호텔이 늘어선 풍경은 칸의 상징이 됐다
ⓒHerve Fabre/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es Cannes

초호화 휴양을 위해 계획된 도시

칸은 원래 한적한 어촌이었다. 무성한 갈대 탓에 어부들에게조차 인기가 없던 마을로, 이름도 갈대Canne에서 왔을 정도니 짐작이 갈까. 배가 정박하기 어려워 무역도 발달하지 못했고 어부들도 해변이 아닌 언덕 위에 마을을 이뤄 살았다.
이러한 칸의 역사는 19세기, 한 사람으로 인해 바뀌었다. 전 영국 총리 브로엄Henry Brougham 경이다. 19세기 중반, 겨울을 보내러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우연히 칸에 머물게 된 그는 이곳의 호젓함이 마음에 들어 별장을 짓고 매년 겨울마다 찾게 된다. 그를 따라 영국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잡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항구가 지어지고, 해변이 정돈됐다. 수요가 생기자 부동산 업자들이 뛰어들었다. 러시아와 영국 등지의 왕족과 귀족들이 이탈리아 대신 남프랑스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칸은 본격적으로 ‘휴양지’라는 타이틀을 걸었다. 크루아제트Croisette 해변을 따라 야자수가 식수되고, 귀족들의 투자로 카를통Carlton· 마제스틱Majestic·마르티네즈Martinez 등 하얀 페인트를 칠한 고급 호텔이 들어섰다. 흰색은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반사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금세 칸의 상징이 되었다. 집집마다 다른 색의 페인트를 선택해 알록달록한 주변 도시와 달리, 커다란 상업 호텔들이 같은 색으로 늘어선 칸은 독특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크고 안락한 호텔. 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럭셔리 휴양’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태어났다.

칸 영화제는 고전 영화를 초고화질로 복원 상영하는 칸 클래식 파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포스터의 주인공은 알랭 카발리에의 <라 샤마드>(1968) 속 카트린 드뇌브
ⓒFestival de Cannes

꾸준한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문화 전략

도시의 운영 면에서 ‘휴양’ 이미지는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여름과 겨울 외에도 지속적으로 고객을 유치하려면 문화나 스포츠 등 사람을 끌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했다. 당시 급격히 향유 인구가 늘어나던 자동차나 영화 등이 매력적이었지만, 이미 모나코가 그랑프리1929-를, 베니스가 국제영화제1932-를 선점한 뒤였다. 그런데 1938년 베니스에서 사건이 터진다. 히틀러의 압력으로 나치 선전 영화가 심사위원의 만장일치 영화를 누르고 우승한 것이다. 프랑스·미국·영국 참가자들은 다시는 베니스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는 마음이 급했다. 다음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기 전에 그 타이틀을 프랑스로 가져와야 당위성을 갖고 새 영화제의 시작을 알릴 수 있을 터.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걱정하는 일부 정치인을 뒤로하고, 내무부 장관은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럽 영화제’로서 프랑스만의 영화제를 시작할 것을 발표했다. 개최지는 베니스와 비슷한 느낌의 해안 도시 10곳이 경합했다. 결과는 대서양 연안의 비아리츠Biarritz로 낙점, 그러나 문화 산업이 절실했던 칸의 정치인과 호텔 대표들은 총력을 기울여 개최지를 칸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1939년 여름, 영화를 발명한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ere를 위원장으로 한 첫 영화제를 앞두고 미국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을 태운 정기선이 칸에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축제가 시작되던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영화제는 무기한 연기됐다.
첫 영화제를 보류한 지 9년이 흐른 1946년 9월. 해변의 그랜드호텔에서 제1회 칸 영화제가 개최됐다. 초반은 축제가 자리잡기 위한 사교 행사 정도로 열렸다. 1959년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영화 선정위원이 된 뒤로 기존의 도제식 경로를 거치지 않은 신진 감독에게도 기회가 돌아갔다.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장 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 등 전통을 거부한 누벨바그 작품이 칸 영화제를 중심으로 부흥했다.
이후 프랑스 68혁명을 기점으로 창작의 자유를 존중하는 다양한 예술 영화를 올렸다. “영화의 질이 어떤 외교적 상황보다도 우선한다”는 창설 모토를 지키며. 1983년 공식 상영관인 팔레 데 페스티벌을 오픈한 뒤부터는 중국·호주·인도 등 비서구권 작품을 선정해 국가 폭을 넓혀나갔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은 2000년 임권택의 <춘향전>으로 처음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올해는 몽골·세네갈·튀니지 등 국가의 작품이 처음 경쟁 부문에 올랐다.

5개 전문 상영관이 있는 팔레 데 페스티벌 내 드뷔시 극장에선 ‘주목할 만한 시선’ 분야가 상영된다
ⓒ전윤혜

영화산업을 끌어오다

영화의 질만을 가리는 영화제는 감독이나 배우를 보기 위한 일회성 방문지에 그칠 수 있다. 지속해서 영화계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산업’을 가져와야 했다. 칸이 도시로서 존속을 위해 영화제를 구상했다면, 영화제는 축제로서 존속을 위해 영화 산업을 기획했다.
앙드레 말로는 칸의 영화관에서 알음알음 이뤄지던 필름 구매를 1959년 공식 필름 마켓으로 승인하고 영화산업 종사자들을 초대해 필름 마켓용 거래·상영 공간을 마련했다. 산업 종사자들이 스스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끔 기획한 것이다. 이는 베니스(2000년 개설)에는 없던 시스템으로, 칸 필름 마켓은 관계자들의 입을 타고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2000년에는 해변 모래사장을 따라 국가관Village International이 신설됐다. 나라별로 부스를 대여해 로케이션 홍보나 법률, 세금 문제 등 자국의 영화 관련 실용적인 정보를 안내한다. 영화를 기획하고 있거나 촬영지를 고민하는 창작자들은 부스를 둘러보며 쉽게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인터뷰나 행사도 이뤄진다. 예를 들어 지난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공식 기자회견이 끝난 뒤 한국관에서 한국 언론 간담회를 열었다.
칸 영화제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은 곳곳에서 열리는 파티다. 공식 파트너인 쇼파드·BMW 등을 비롯해 각종 후원사가 해변과 호텔 곳곳에 자사 VIP 고객을 위한 파티를 마련한다. 영화제와 관계없는 회사도 칸을 찾는 유명인을 겨냥해 자체 행사를 주관하고, 초대받은 소수만 입장하거나 입장료가 어마어마한 자선 행사와 네트워킹 행사도 열린다. 에이즈 연구 재단인 amfAR의 이브닝 갈라나 불우 아동을 돕기 위한 글로벌 기프트 갈라 등이 그 예다.
그러니 칸 영화제는 영화의 경합장일 뿐 아니라 산업 종사자의 거래장, 창작자가 정보를 얻는 박람회, 네트워킹의 기회를 제공하며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양한 형태의 이벤트가 언론과 입소문을 타고 계속해서 홍보가 된다. 그리고 이슈는 늘 영화제가 사수하는 외부 이미지, 레드카펫과 드레스 코드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입고 증폭된다.

칸 영화제는 감독과 배우뿐만 아니라 취재진에게도 철저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한다
ⓒFestival de Cannes

도시에 미치는 관광 문화적 파급력

칸이 지역 주민에게 미치는 ‘문화적인’ 혜택은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거의 없다. 평생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데 페스티벌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시민이 태반이다. 매일 밤 무료로 상영하는 해변 극장 정도를 경험할 뿐. (이는 영화제 규모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축제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탓이다.
칸 영화제는 오로지 영화인을 위한 자리로, 인증된 배지를 가진 사람만이 영화를 볼 수 있다. 배지마저 중요도에 따라 나뉘어 입장이나 행사 참석 등에 영향을 받는다. 명백히 계급적이다. 일반인이 배지를 받는 방법은 영화학도 인증인 시네필이나 26세 이하에만 제한적으로 발급되는 3일권 정도인데, 이 역시 사전에 자기소개서를 제출해 통과해야만 받을 수 있다. 보통 지역 주민에게 할인 티켓이나 참여를 보장하는 다른 도시의 ‘지역 친화적 축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 지역 주민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결국 관광 수입이다. 칸의 본격적인 여름 성수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6월부터 시작되는데, 칸 영화제로 하여금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성수기를 3주가량 이상 앞당기는 셈이 된다. 올해도 영화제 기간 중 절반 이상 비가 왔다. 그럼에도 수요는 창출된다. 이는 날씨가 경제를 좌우하는 바닷가 휴양도시에서는 특히 중요한 지점이다.
영화제 기간 칸에 머무는 인구는 약 23만 명. 거주 인구 7만여 명의 3배가 넘는다. 그중 8만 명은 영화제를 위해 방문한 관광객, 4천 명은 언론인, 나머지는 영화산업 종사자 및 영화제 기간 각종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의 관계자들이다. 칸 영화제를 위해 직접 고용된 인력은 1천여 명에 달하며, 부가적으로 의전, 특수 운송, 케이터링 등 많은 럭셔리 투어리즘 산업이 파생된다.
영화제는 근대 칸이 자생력을 가지기 위한 첫 시도이자 성공적인 사례다. 이후 칸은 3월의 국제부동산박람회MIPIM, 6월의 국제광고제Canne Lions, 10월 영상콘텐츠박람회MIPCOM 등이 열리며 연중 손님을 맞는다. 이제 더 이상 휴양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문화 컨벤션 도시로 자리잡은 것이다. 20세기 초의 계획대로.
칸 영화제는 종종 배타성으로 지적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유지하는 덕에 더 많은 이들을 불러 모은다. 칸은 그 지점을 잘 알고 있다. 칸이라는 도시가 시대에 발맞춰 귀족 휴양지의 ‘이미지’를 계획한 것처럼, 영화제 역시 또 하나의 이미지로서 높은 장벽의 전문성과 그에 따르는 배타성을 고집한다. 최근 다른 영화제에 비해 칸 영화제의 위상이 더욱 독보적으로 올라서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전략은 유효한 듯싶다.

전윤혜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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